언젠가 청소년 쉼터에서 '가족'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누가, 어떤 이유로 먼저 말을 꺼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내심 가족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억울하고 슬픈 감정들만 토해질 것 같아 걱정했다. 하지만 다들 의외로 희망에 가득 찬 이야기를 꺼냈던 걸로 기억한다. 으레 그렇듯 자신의 신세 한탄으로 끝날 것만 같던 이야기는 갖고 싶은, 도달하고야 말고 싶은 그런 가족상을 그리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많은 쉼터생들은 이왕이면 '자식'도 있기를 바랐다. 딸이든 아들이든 상관없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자신이 반반 섞인 존재를 보고 싶다는 것이다.
평소 쉼터 선생님이 자신의 아버지라고 주장하던 명수 형은 굳은 얼굴로 가족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민수는 자신이 여자 친구를 많이 사귀는 행동도 외로워서 그렇다고 답했다. 요한 형도, 광휘도, 태현이도, 모두가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들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우리는 행복한 가족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따금씩 고개를 들어 행복한 가정 속의 사람들을 보면 미칠 듯한 부러움이 치솟는다. 저렇게 웃을 수 있는 이유가 가족 때문이라면 나도 한 번 가져보겠다고 결심하게 만드는 광경을 떠올리고. 그렇게 가족이란게 행복하다면 나도 가져봐야겠다고 결심하고. 그리하여 우리들의 모든 고난이 보답받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 보답이란 가족이다. 만약에 이상적이고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나는 내 삶을 기꺼이 긍정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가족을 원함과 동시에 가족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살면서 많은 불합리를 겪어 왔다. 외부의 압력에 굴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모습을 몇 번이고 보았다. 그런 내게 가족이란 건 무능력한 사람이 결코 가져서는 안 되는 무언가였다. 아주 멋진 집을 만들고 그 마지막을 장식하는 명화처럼, 나에게 가족은 결말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가족을 원하는 쉼터생들에게 물었다. '만약, 우리가 힘이 부족해서 가족을 지키지 못한다면 어떡할 건가? 가족은 먼저 준비된 상태에서 만들어야 한다.' 부끄럽게도 내 아버지는 어머니가 당한 성희롱을 무시하자고 한 적이 있었다. 직장의 술자리에서 성희롱을 당했던 어머니를 아버지는 상대방이 사과도 했으니 덮고 가자고 했다. 그 모습을 몰래 지켜보면서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싸우지도 못하는 부친에게 실망했다.
그래서 요한 형에게 물었다. 만약에 더 공부하고 싶고, 재능을 펼치고 싶어하는 아이에게 적합한 기회를 제공해주지 못한다면 얼마나 미안할 것인가? 내 항변에 요한 형은 '그 때 가서 미안해 하면 되지.'라는 답을 내놓았다.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이는 받아들이기 힘든 말이었다. 사람이 사람인 이유는 지성이 있기 때문이다. 지성은 몇 년, 몇 십년을 예측하며 미래를 설계할 수 있게 해준다. 선한 이라면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슈퍼카의 조수석에 그 누구도 태우지 않으려 할 것처럼, 사람은 뻔히 예정된 파멸을 맞이해서는 안 된다. 아이들의 교육도, 행복도 책임질 수 없는 이가 부모가 된다는 건 무책임한 일이다. 그리고 자녀가 부모에게 바라는 물질적-정서적 지원의 역치 또한 높아져만 가고 있다. 그렇기에 청소년 쉼터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소위 말하는 '좋은' 부모가 되기는 희박하다. 일단 사회적으로 성공을 이뤄야 자식을 만들 수 있지 않겠나.
게다가 쉼터생들의 정서적 불안정함도 좋은 가정을 만드는 데에 방해가 된다. 아이들은 부모를 보고 배운다고 하는 말이 있듯이 제대로 된 멘토 없이 성장한 우리에게 아버지, 어머니라는 이름은 한 없이 무겁기만 하다.
지금도 물론 당시의 내가 틀리지 않았다고 여긴다. 동시에 겨우 틀리지만 않았다고 여긴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고, 에세이를 집필하면서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미국의 시인 메리 올리버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을 살기 위해서는 세 가지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죽을 수밖에 없는 것들을 사랑하기. 자신의 삶이 그것들에 의지하고 있음을 깨닫고 그들을 가슴 깊이 끌어안기. 그리고 놓아줄 때가 되면 놓아주기.' 이렇듯 인생은 결국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들을 사랑하는 방식이다. 이를 조금이나마 깨달은 뒤로 가족을 만들고 싶다는 이들을 미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고통 받게 하기 위해 무고한 생명을 탄생시키는 게 아니라, 사랑했기에 생명이 발생한 것이다. 사람은 사랑하도록 태어난 생물이니까. 이 이상 말로는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나는 어느 정도 마음을 다치게 만드는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운 듯하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하지만 이토록 고난과 역경이 많았고, 앞으로 많을 인생에 선뜻 무고한 생명을 데려온다는 게 받아들이기 힘든 점이기도 하다. 나는 가족을 갖고 싶고, 자식을 낳고 싶지만 동시에 그게 얼마나 이기적인 선택인지 알기 때문에 이토록 괴롭다. 그리고 나는 이 글을 몇 번이고 수정하는 내내 아직도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