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거주했던 청소년 쉼터는 단기 청소년 쉼터였다. 원칙적으로 단기 청소년 쉼터는 3개월 동안만 거주할 수 있다. 하지만 쉼터의 정원이 여유롭거나, 해당 쉼터생이 모범적이라면 선생님들도 거리낌 없이 거주 기간을 연장해 주는 식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비교적 쉼터에서 아이들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어주는 윤활유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기에, 쉼터 생활을 더 이어 나갈 수 있었다. 아마도 나도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면 그러했을 것이다.
어느 날 광휘가 청소년 쉼터에서 퇴소했다. 당시에 청소년 쉼터에는 사람이 많아졌는데, 아마도 거주할 수 있는 기한이 다 되고, 가장 가정환경이 나은 편에 속했었기에 선생님과의 상담 후 퇴소를 진행한 것으로 보인다(무려 광휘는 생활비를 부모로부터 지급받고 있었다). 광휘는 떠나면서 대체 어떤 생각을 했을까. 혹시나 자신이 버려졌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그때 나는 수중에 얼마 없는 돈을 가지고, 조촐하게 광휘를 위한 파티를 열었다. 나만의 작별 인사였고, 고마움의 표현이었다. 광휘를 떠나보내고 부끄러운 일을 하나 저질렀는데, 쉼터 선생님에게 쌀쌀맞게 대한 일이었다. 그때의 나는 쉼터 선생님이 광휘를 버렸다고 생각했었다. 광휘는 그나마 사정이 나았기 때문에 ‘선별’되었다고 여겼다.
광휘의 퇴소를 겪은 나는 심경에 파란이 일어났다. 나도 퇴소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었는지, 박수받을 때 떠나고 싶다는 마음이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때 이후로 나는 천천히 퇴소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퇴소, 혹은 독립. 자취를 할 지역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내 지인들은 원룸 가격이 싼 지방에서 거주하라고 나를 만류했었으나, 나는 이상하리만큼 서울로 올라가고 싶었다. 조금 더 넓은 세계를 경험해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있기도 했고, 재수 때 명문대에 진학하고 싶었다는 욕심이 작용하기도 했었던 것 같다.
명문대는 내 꿈의 목표였다. 열심히 공부하는 내가 인정받을 수 있는 골 라인. 하지만 그 때 생각해보면 대학에 가서 무엇을 해야 할지는 몰랐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돈을 모았으면 대학에 복학할 생각을 했어야지, 왜 서울로 올라간단 말인가? 하지만 당시에 나는 대학생에게 돈을 빌려주는 정부 지원 정책이 있는 줄도 몰랐고, 그걸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다. 햇살론 유스라던가, 국가 장학금 제도 같은 것을 말이다. 선생님들이 의도적으로 정보를 누락했을 가능성은 없었으니, 아마 본인들도 잘 모르셨거나 그만큼 청소년 쉼터에서 대학을 가는 이들이 적었다고 보는 편이 맞았다.
그렇게 나는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학원 강사는 경력직만 뽑고 있었고, 음식점 아르바이트는 장시간 시켜주는 장소가 없었다. 당시에는 코로나 여파로 쓸만한 아르바이트 자리가 씨가 말라버렸었다. 결국 나는 당시 많은 젊은이들을 모집하던 쿠팡 계약직에 지원했다. 아무래도 나는 허리 디스크를 앓고 있었기에 무리가 가지 않는 집품이나 포장을 위주로 했었다.
쿠팡 일도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다. 윽박지르고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관리자도 있었다. 그리고 개중에서 가장 나를 짜증스럽게 만들었던 것은 택배 포장 근로자였다. 일반적으로 나는 물건을 진열대에서 빼오는 집품 업무를 맡았는데, 어느날 땜빵으로 포장 업무로 들어간 적이 있었다. 당연히 어떻게 포장하는지 몰랐던 나는, 주변 택배 포장 근로자에게 배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면, 그 노동자가 의도적으로 내가 포장을 느리게 할 수밖에 없는 방식을 가르쳐 주었던 것이었다. 왜냐하면 택배 포장 업무는 그나마 체력적으로 덜 힘든 업무에 속했고, 만약 내가 빠른 업무 효율을 보인다면 포장 업무로 재배치 될 것을 두려워한 그들의 ‘나와바리’였던 것이다.
나는 이를 나중에 알았고,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하지만 이 일은 전혀 의외의 방식으로 해결되었는데, 내가 포장 업무를 하는 이들 중 한 명이 버스에서 하차한 후 사이비가 끈질기게 들러붙는 것을 막아내면서 그들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때부터는 나도 편하게 포장 업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돈을 꾸준히 모으기를 3개월. 드디어 나는 독립 준비를 끝마쳤다.
이제 정말로 독립이 초읽기로 다가왔다. 쿠팡 계약직을 끝마치고 수중에 있는 돈은 당장 계약금과 첫 달의 월세 그리고 생활비 뿐이었고, 서울로 상경하자마자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아야만 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현실 감각이 없었다. 돈을 모았으면 허리를 치료하거나(당시에는 허리 디스크인 줄 몰랐다), 복학을 위한 아르바이트를 이어나가야 했다. 그러나 내게는 안 좋은 성격이 하나 있었으니, 어느 한 분야에 꽂히면 그 하나만 바라보다가 나머지 중요한 일들을 모조리 놓쳐버린다는 점이다. 당시에는 무작정 자취를 하다보면 인생 경험이 되어 내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자취를 하면서도 충분히 돈을 모을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어쨌거나 나는 유튜브나 블로그 등 인터넷 서칭을 통해 원룸을 계약하는 법을 알아보았고, 서울의 자취 많이 하기로 유명한 장소로 자취방을 구했다. 솔직히 첫 원룸 계약이고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서 평판이 좋은 공인중개사를 찾아갔다. 공인 중개사 분은 무척이나 친절했다. 보호자 연락처를 머뭇거리며 적는 나의 사정을 파악하고, 아껴 두었던 좋은 품질의 원룸을 안내주었으며 계약시에도 일정 부분 금액을 깎아주셨다. 쉼터에 나오고 받은 첫 호의였다.
계약을 끝마친 나는 당장 다음 달부터 원룸에 입주하기로 되었다. 어떻게 어떻게 여름 방학 시즌과 시기가 겹쳐 쉼터에서 리조트 여행을 가게 되었고, 사회 복지사님들이 사비를 털어 사주신 음식도 먹었다. 프로그램 중 하나였던 모래사장 바이크도 즐겼다. 쉼터로 돌아온 뒤로는 씁쓸한 이별식이 펼쳐졌다. 쉼터 선생님으로부터 평소에 읽고 싶었던 도서 <전쟁론>과 책깔피를 선물 받았다. 다른 쉼터생들도 각자의 방식으로 나를 환송해주었다. 민수는 자신이 직접 만든 무드등을 건네주었다. 태현은 이별의 레슬링이라며 허리 아픈 나를 잡아 당겼으며 요한 형은 기타를 쳐줬다.
나는 모두들의 인사를 받으며 쉼터를 떠났다. 서울로 올라간 뒤 전입신고를 하고, 주거지 등록을 했다. 본격적인 독립 생활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