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변두리에 있는 원룸 하나가 내 새로운 '집'이 되었다. 내가 독립했던 당시는 아직 코로나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상권 경제는 추락하고, 아르바이트 자리는 씨가 말랐다. 코로나 이전에는 흔했던 편의점 아르바이트 자리도 파트 타임으로 잘게 쪼개지고, 지원자도 넘쳐나게 되었다. 나는 쉼터의 원장님께서 챙겨주신 외투를 고쳐 입고 아르바이트 면접을 진전했다. 하지만 주간 아르바이트 자리는 도통 구하기가 힘들었고, 간신히 야간 편의점 아르바이트와 야간 PC방 아르바이트 자리를 따낼 수 있었다. 아무래도 '성인' '남성'이라는 정체성이 야간 아르바이트에서 경쟁력을 가졌던 모양이었다.
그건 정말로 다행인 일이었다. 여성들이 피시방 아르바이트를 얻기 위해서 외모를 보는 것처럼, 남자들도 야간 아르바이트를 얼마나 잘 해낼 수 있을 지를 담당자가 가늠하기 마련인데. 당시의 나는 꾀쬐쬐하기 그지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그 꾀쬐쬐함 때문에 배려를 받은 것 같았다.
야간 아르바이트 두 개를 번갈아 일하는 건 정말로 힘들었다.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어서 수면 유도제를 먹고 자야만 했고, 낮과 밤이 바뀌니 생체 리듬이 꼬였다. 신체 건강과 정신 건강에 모두 타격을 입자 보복소비와 충동소비가 따라왔다. 그랬더니 당초 생각했던 것보다 저축을 할 수가 없었다. 하루 아침 점짐 저녁 중 두끼를 배달 음식으로 사먹었다. 그리곤 심심하다는 이유로 중고 거래 사이트에서 테블릿 PC를 충동 구매했다. 몇 번 사용하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사실 과소비 같은 경우는 나중에 발병한 우울증에 비하자면 비교하기 미안할 정도로 중요하지 않았다. 우울증에 걸리니 먹는 것도, 일을 하는 것도 너무나 벅찼다. 특히 저녁에 일어나 편의점과 피시방을 향해 (일을 하러) 갈 때는 전부 다 때려치우고 싶었다. 피시방에서 아무런 걱정도 없이 온종일 게임을 하고 있는 내 또래를 보면, 나는 살기 위해 일을 해야 하는 현실과 아무런 걱정 없이 휴식할 수 있는 처지가 비교되어 우울감만 증폭되었다. 우울증이 심해지니, 충동 소비와 보복 소비가 늘었다. 나중에는 돈이 부족해서 신용카드를 뚫어 매달 매달 돈을 내기 위해 살아가는 인생으로 변모했다.
그럼에도 살아남아야만 했어서 발품을 팔아 내가 신청할 수 있는 복지 정책이나, 지자체 프로그램을 찾아보았다. 복지 센터에서 내 사정을 설명하고 받을 수 있는 복지 정책들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여성가족부의 청소년 쉼터 청소년을 위한 자립 지원 프로그램에는 '(1)퇴소 5년 이내일 것', '(2)최소 2년 이상 보호 받을 것'이라는 조건이 충족되어야 했기 때문에 나는 부적합했다. 복지사 님들도 나를 위해 애를 써주셨지만, 나에게 맞는 복지 정책을 찾을 수는 없었다. 나를 도울 수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시선을 회피하는 복지사님들의 얼굴을 아직도 기억한다. 절제된 거절. 부드러운 무력감이 느껴졌다.
그나마 서울시 청년 월세 지원으로 숨통을 틔울 수 있었지만, 아르바이트 계약이 만료되면서 다시 생활고가 찾아왔다. 고용주들은 나를 붙잡았지만, 야간 아르바이트를 더 했다가는 정말로 죽을 것 같아서 사양했다. 처음에는 나를 좋게 보던 피시방 매니저가 주간 아르바이트로 옮기는 건 어떠냐고 제안했지만, 당시에는 야간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그만두지 않았기 때문에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야간 아르바이트를 더 이상 못 해먹겠다고 생각한 뒤, 주간 아르바이트를 잡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낮밤이 바뀌어 있었기에 합격 통보를 뒤늦게 발견해 채용되지 못했던 상황도 있었다. 그 아르바이트는 내가 취업하기 위해 꽤나 애를 쓰던 아르바이트로 최대한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멀끔히 차려 입고, 기회가 된다면 업무도 지금 경험해보고 싶다고 어필했었던 아르바이트였다.
나 자체가 볼품없어졌다고 여겨지자 자연스레 친구들과의 만남도 뜸해졌다. 최악의 상황을 마주하자 지인들을 마주볼 용기가 없어졌다고나 할까. 그래도 어찌어찌 마트 아르바이트 자리를 얻었다. 하지만 수면 유도제의 영향으로 건망증을 얻어 버린 나는 실수만 연발했고, 3개월 가량을 일하다가 일을 그만두었다. 계약직과 정규직 간의 차별도 견디기 어려웠다. 아무리 내가 먼저 입사했고, 더 오래 일을 했어도 계약직은 정규직이 손 쉽게 부릴 수 있는 대상이었다.
건망증이 심각해지자, 나는 정신과를 찾아가 사정을 설명한 뒤, 약을 타먹기 시작했다. 원래 수면 유도제를 지나치게 남용할 경우, 나와 같은 문제점이 찾아온다는 설명을 들었을 때는 충격을 금치 못했다. 그런 문제점이 있다면 판매를 제한했어야지. 그 여파는 아직도 남아 있어서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아직도 정신과 약을 매일 먹고 살고 있다.
결국 당장 먹고 살길이 막막해지자, 나에게는 코로나 지원금이 한 줄기 구원줄이 될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코로나 지원금 대상자가 아니었고, 복지 센터에 거의 빌다시피 애원해서 간신히 코로나 지원금 대상자로 선정될 수 있었다. 단돈 20, 30만원이 내게 절박했다고 한다면 믿겠는가?
나 뿐만이 아니라 청소년 쉼터 속 쉼터생들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우선 요한 형은 중고 거래로 사기를 치다가 걸려 보호 관찰을 받게 되었다. 태현도 독립을 했다가 생활고로 민수에게 돈 30만원을 빌렸다가 잠적했다. 특히 요한 형은 나에게도 돈을 빌렸다가 그 돈을 갚지 않고 잠적해버려서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내게 원룸에서 월세를 반반 부담할 테니 서울로 올라가기 위한 차비를 요구했다가, 그대로 연락이 끊겼다. 오히려 못 믿음직스럽던 광휘가 나와 가끔씩 연락하며 안부를 묻는 정도였다.
언젠나처럼 일을 끝마치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오랜만에 친구로부터 카톡이 왔다. 내 생일을 축하한다는 메시지였다. 나는 내 생일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적지 않은 시간을 혼자 보내면서 이대로 가면 나는 대학교 복학이나, 허리 디스크 치료나, 우울증 치료를 받을 수 없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그래서 나는 연락을 끊었던 어머니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받을지 받지 않을지 아무도 몰랐다. 나는 어머니 연락처를 차단한 상태였었으니깐 말이다. 영원 같던 송신음이 끝난 후에는 고등학교 시절과 비교해서 아무것도 바꾸지 않은 어머니의 목소리가 울렸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그냥 무뚝뚝하게, 최대한 고저 없는 목소리로 대화를 시작했다.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비굴해지고 싶지 않았다. '오랜만이야'라고 안부를 묻자 어머니는 오열을 터뜨렸다. 나와 어머니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만나게 되었고, 금전적 지원을 받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병원에서 이제껏 있었던 허리의 불편함이 허리 디스크였음이 밝혀졌고(장장 2년만의 발견이었다), 서울에 있는 '집'의 계약이 끝나면 본래 '집'으로 돌아가 우울증과 수면 장애를 치료하기로 했다.
어미니가 나를 만나기 위해 서울로 방문했을 때는 동생과 함께였다. 동생은 그간 있었던 일을 풀어주었다. 내가 떠나가고 난 뒤에 부친과는 별거를 시작했다고 했다. 그 동안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다고 말했다. 정말로 나는 그들이 그만큼 죄책감을 느꼈을 줄은 몰랐다. 나는 그동안 서러웠던 일들을 토로했다. 내가 너를 괴롭히는 부친을 막아서느라 잠을 자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내가 부친을 막아서고 있어야 네가 그나마 편히 잠들 수 있었다.
울지 않은 건 오직 나뿐이었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들이 나를 위해 이렇게 울어준다는 건 내 아픔을 알아줘서일까. 그렇다면 내가 요구하는 어머니와 부친의 이혼을 받아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눈물을 흘리던 둘의 반응은 꺼림찍했다. 어머니는 흘리던 눈물을 닦으며 자신의 인생은 내가 결정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즉시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그랬더니 숨이 찰 정도로 뛰어온 동생이 나를 막아섰다. 오빠를 사랑하지만, 부모님이 이혼을 하면 본인의 학비는 어떡하냐는 말을 했다. 그래서 이혼을 반대한다고 했다.
나는 집을 나왔을 때에도, 혼자서 일을 할 때에도, 우울증에 걸렸을 때에도 울지 않았다. 우는 것은 나약함의 증거라고 생각하며, 언제부터인가 우는 법을 잊어버렸다. 하지만 그때만큼은 울지 않을 여력이 없었다. 나는 그토록 혼자서 쓸쓸히 집으로 돌아갔다. 두 눈에 눈물을 머금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