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 우리는 어떤 차(茶)가 되어가는 중일까
그날 이후, 나에게는 매일 차를 마시는 시간이 생겼다.
더불어 공황장애를 근본적으로 이겨내기 위해 청년 상담도 신청했다.
그 두 가지가 그해 내가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는 매해 연말, 스스로 칭찬해 줄 만한 일을 순위 매겨보곤 하는데,
사실 배고플 때 맛집을 찾아내거나 4DX로 영화 한 편을 본 것만으로도
1위가 쉽게 바뀌는 가벼운 순위표였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상담은 병원 진료와 비슷하면서도 결이 달랐다.
비유를 하자면 병원이 약물 처방을 통해 고장 난 부품을 고치는 ‘하드웨어 수리’라면,
상담은 1시간 넘게 대화를 나누며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 자체를 재설정하는 ‘소프트웨어 업데이트’ 같았달까.
매주 1시간이 10분처럼 느껴질 정도로 빠르게 흘러갔다. 나를 다시 만들어가는 시간이었다.
상담의 주된 주제는 두 가지였다. 내가 다시 겪게 된 불면증,
그리고 엘리베이터 같은 곳에서 또 쓰러지면 어쩌지?라는 막연한 공포.
"수면 건강에는 타협 따윈 없어요."
상담 선생님의 단호한 조언에 따라 나는 밤낮을 되돌리고, 간단한 운동과 명상으로 루틴을 만들어갔다.
사실 명상이라니, 단어부터 왠지 뭔가 오글거렸다.
하지만 쭈뼛거릴수록 불면의 밤은 더 길어졌기에,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눈을 감았다.
생각이 많아질 땐 차를 내리고 그 과정에 집중하다 보면 많던 걱정들이 조금씩 없어지기도 했다.
그렇게 호기심 반, 위로 반으로 차의 세계를 기웃거리다 명상에 큰 도움이 되는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세상의 수많은 차,
그러니까 맑은 녹차부터 붉은 홍차, 묵직한 흑차까지 이 모든 것이 사실은
‘카멜리아 시넨시스(Camellia Sinensis)’라는 단 하나의 차나무 잎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같은 잎인데도 결과물이 달라지는 비밀은 '발효'에 있었다.
찻잎이 공기와 만나 숨을 쉬게 두느냐, 아니면 열을 가해 그 숨을 멈추게 하느냐에 따라 차의 운명이 갈린다.
갓 딴 잎을 솥에 덖거나 쪄서 산화를 막으면 싱그러운 '녹차'가 되고,
솜털 덮인 어린싹을 그대로 건조하면 순수한 '백차'가 된다.
공기 중에서 잎을 얼마나 비비고 흔들어 깨우느냐에 따라 은은한 꽃향기의 '청차(우롱차)'가 되기도 하고,
완전히 산화시켜 잎의 진액을 붉게 끌어올리면 우리가 아는 '홍차'가 탄생한다.
거기에 미생물의 힘을 빌려 오랜 시간 묵히면 깊은 맛의 '흑차(보이차)'가 되기도 한다.
같은 잎이라도 어떤 시간과 공기를 만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향기를 품게 된다는 것.
그 사실이 묘하게 위로가 되었다.
지금 내가 겪는 이 불안과 불면의 시간도 나를 망가뜨리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나만의 향을 찾아가는 ‘발효’의 과정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일까. 명상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 달라졌다.
지금도 잠이 오지 않을 때면 나는 찻잎이 공기를 만나듯 내 호흡에 집중해 본다.
내 몸 안에 고여있던 뜨겁고 묵직한 숨이 밖으로 나가고,
대신 서늘하고 신선한 공기가 천천히 들어오는 것을 느낀다.
잡생각이 꼬리를 물어 그조차 집중이 안 될 때는, 입과 코에 나만의 가상 관을 연결했다고 상상한다.
‘오직 이 관으로만 공기가 통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숨을 잘 모아서 훅 불어넣고, 다시 천천히 들이마신다.
마치 찻잎을 덖고 비비며 나만의 차를 만들어가듯 호흡을 다듬다 보면,
어느새 스르륵 잠에 빠져든다.
눈을 뜨면 다음 날 아침이다.
이제 나는 어제보다 조금 더 잘 우려진 사람이 되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