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이름으로 존재하는
I'm the new Berlin wall
(난 새로운 베를린 장벽이야)
Try and tear me down
(날 갈갈이 무너뜨려봐)
시금치, 배추, 사과, 포도, 은행, 소나무, 개, 소, 고양이, 고슴도치, 정치인, 경찰관, 소방관, 교사, 부모, 자식, 사촌, 유럽인, 동양인, 백인, 유색인종, 중산층, 상류층. 수만 가지 과일 중에 먹을 수 있는 것, 수만 가지 동물 중에 유용한 것, 수만 가지 인간 특징 중에 쓸모 있는 것. 우리는 편의에 따라 무언가를 정의하고 정의 내리게 된 특질과 관련된 이름을 붙여준다. 하지만 정의에 속하게 되는 모든 존재는 단지 그런 정의된 이름으로 불리기엔 정의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다양해서 오직 유일한 그들의 이름을 부여받는다.
That the pain down in your soul
(네 영혼 안의 고통은)
Was the same as the one down in mine
(내 안의 것과 같았어)
흔히들 인간의 개성이 주목받기 시작한 시기는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예술의 역사는 깊다. 오래전부터 한 개인의 정신적 산물을 시각적 혹은 청각적으로 표현한 예술의 매력은 인정받아 왔다. 시대에 발맞춘 아름다움을 가진 동시에 독창적이게 뛰어나야 했다. 심지어 신들도 남들과 다른 무언가를 가진 존재여야 했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각 신은 개성이 뚜렷하다. 우리나라 고대 왕들도 활을 유독 잘 쏘거나 알에서 태어나는 등의 특징이 분명히 있다. 그렇다. 결국 특징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진 고유한 지문과 같은 존재지만 과거에는 모든 사람의 독자적인 특징을 받아 줄 여유가 사회에 없었다. 대략 유사한 성질들, 그중에서도 쓸만한 무언가를 묶어서 '일반적으로'라는 수식어와 함께 모두에게 부여됐다.
그러나 이제는 모두가 자신이 특별함을 인정받아야 마땅한 존재임을 깨달았다. 겨우 '모두'나 '대부분'이라는 광범위한 덩어리에 속하기엔 아까울 만큼 복잡하고 다양한 생명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이 영화를 보면서 헤드윅을 어떻게 불러야 좋을까 고민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알게 됐다. 그런 고민마저도 나의 편의를 위해 감히 누군가를 쉬운 단어로 정의하려 하려는 자만의 실수임을 말이다. 그저 헤드윅은 헤드윅이라는 말로밖에는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평소에 영화의 예고편이 나오면 우리는 예상하기 시작한다. 주인공의 성격과 줄거리가 이러할 것이라는 대략적인 그림을 그린다. 예상은 상상을 낳아 생각을 확장해 주는 역할도 하지만, 과용하면 오히려 생각을 제한시켜 버리는 것이다. 인간에게 한계란 없다. 반드시라는 말도 없다. 100%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차마 아직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궁무진한 가능성들이 앞으로 발견될 뿐이다. 헤드윅처럼 베를린 장벽에 선 사람은 많다. 자신이 어디에 속하는가 하는 고민을 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마침내 장벽이 무너지면 그들이 서 있던 곳은 그저 다른 땅들과 같다. 장벽에 선 사람들은 그저 다른 사람과 같다. 오히려 장벽에 올라서서 장벽 아래에 선 사람들이 보지 못한 서로를 너머 바라봐 온 경험이 있다. 무엇도 아니라는 오명을 씻고 모두 가능한 사람이 된다.
All the misfits and the losers
(모든 부적합자와 패배자들아)
Well, you know you're rock and rollers
(너희는 락앤롤러잖아)
https://tv.naver.com/v/1774600
우리는 아직 헤드윅을 성소수자에 관련된 영화라고 부르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나마 그렇게 부를 수 있음에 감사하는 사회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젠가 다가올 훗날에는 부디 헤드윅도 평범한 한 사람의 삶의 고뇌를 표현한 영화라고 불리길 바란다. 유별남. 독특함. 특이함. 특별함. 당신은 어떤 특별함을 가졌는지 알고 있을까. 알고 있다면 그 특별함은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고 생각할까. 그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만큼 다른 이들의 특별함도 소중히 여겨주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