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아무나 골라서 기적을 보여줘
아주 작은 거면 돼
조금 더 버티면 나중에 행복하게 살 수 있어.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 아까우니까 대학까지만 가자. 기왕 대학교 나왔는데 직업만 가지고 취미로 하면 되지. 우리는 얼마나 많은 핑계들로 내가 사랑하는 일들을 미루는가. 마시멜로우 이야기에서 기다리고 참을수록 더 큰 보상을 받는다기에 나도 참았는데 손안의 행복은 작은 모래알이라 그릇에 담기지 못한 채로 끝없이 바닥에 흩뿌려진다. 생각해보니 마시멜로우는 명확히 참아낸 후의 보상이 정해져 있는 데에 반해 삶은 결이 다른 싸움이었음을 깨닫기까지 현실은 녹록지 않다. 어느 시점을 지나서는 나의 판단이 틀렸음을 인정하기 어려운 인지 부조화 때문에 나는 죽을 때까지 행복을 손에 들고 동동거려야 하나.
죽으면 아무것도 없어요
여기가 천국이에요
영화가 신이라는 다소 무거울 수 있는 소재를 사용하면서 선뜻 보기 꺼려지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정작 영화는 벨기에와 프랑스 특유의 유럽식 코믹으로 말도 안 되는 설정을 뿌리고 있기에 심각한 고민을 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단지 '이러면 어때? 재밌지 않아?'라는 질문으로 규격화된 사회의 기준을 멋대로 지지고 볶는 특유의 감성으로 가볍게 이야기를 따라 자신의 생각도 흘려보면 된다. 심즈처럼 브뤼셀 도시를 만들고 생명체를 만든 인성 쓰레기 신. 그런 신에게 질려서 도망 나와서 인간들에게 기적을 보여준 예수. 신의 컴퓨터를 보고 예수의 뒤를 따라 새로운 신약성서를 쓰러 도망친 에아. 종교라는 이름에 포함시킬 수 없는 혹은 시키지 않는 웃긴 신의 이야기는 사실 작은 기적을 위한 디딤돌 역할일 뿐이다.
어느 날 당신의 죽는 날을 문자로 받는다면 어떨까. 지금 당장, 5분 후, 한 시간 후, 하루 후, 한 달 후, 일 년 후, 십 년 후, 몇십 년 후. 남은 시간에 따라 반응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숫자에 상관없이 사람들에게 와닿을 사실은 내가 이 숫자만큼의 시간이 지난 면 죽는다는 사실이다. 기약할 수 없는 끝을 향해 어찌어찌 버텨내는 삶을 살던 사람에게 정확한 수치로 보여주는 끝은 멍한 충격을 준다. 무엇을 위해 이제까지 살았는지 모를 환멸이 다가오고 결국 죽는다면 나는 행복을 찾아 더 자유롭고 싶다는 욕심이 난다. 애써 외면하던 진정한 나의 모습. 압박에 눌려서 기도 펴지 못하고 반복되던 거짓된 모습이 아닌 그냥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내가 사랑하는 나의 모습 말이다.
영화는 신도 재미 삼아 만든 인생인데 그리 애쓰지 않아도 되지 않냐고 물어본다. 신도 완벽하지 않은데 그가 만든 세상에서 그가 만들어 살게 된 한낱 인간이 뭘 그리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냐며 근심 좀 털어버리라고 어깨를 두드린다. 호기심이 많은 인간은 무언가의 의미를 찾아내기를 좋아하지만 생각해보면 정작 자신의 행동이 모두 커다란 의미를 두고 있지는 않다. 배가 고파서 밥을 먹고, 웃기 위해서 재미있는 영상을 찾아보고, 우울해서 노래를 듣는 등 찾아서 연구해보면 의미가 있기야 하겠지마는 정작 당사자는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는 행동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상한 엘리트주의에 빠진 사람들은 마치 의미 없이 한 행동은 별 쓸모가 없는 양 말한다. 본인은 다 계획하며 사는 착각에 빠진 부류들이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누군가를 손가락질한다.
아이는 커서 뭐가 되나요?
어른은 뭐가 되죠?
에아는 사람마다 자신의 노래가 있다고 말한다. 가끔 버스에 앉아서 길가의 사람들을 보면 특별할 것 없이 비슷하게 움직인다. 그러나 정류장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각자의 사연이 있다. 그러다 내가 아는 사람들을 만나면 다들 서로 참 각양각색의 색을 가지고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토록 여러 가지인 존재들이 왜인지 비슷한 틀에 맞추어 움직이는 병정 인형처럼 보이게 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생명의 유한함도 모르고 앞만 보게 만든 눈가리개를 씌운 건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