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동화
너는 왜 로비보이가 되려고 하지?
그거야. 여기가 그랜드 부다페스트인걸요.
팬톤의 '1976 핑크'와 '블루밍 페탈'이 여기서 가져온 색상이 아닐까 할 정도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동화 같은 색은 한 번에 시선을 사로잡는다. 더군다나 뒷배경은 일부러 인지 고전 동화 삽화를 연상시키며 단지 특유의 환상적인 느낌을 더한다. 어느 날 슈퍼거미에게 물려 스파이더맨이 된 피터 파커, 갑자기 11살 생일에 호그와트에 입학하게 된 해리포터, 전쟁 중 맡겨진 친척 집 옷장 문을 열고 나니아에 도착한 페벤시 4남매처럼 우리는 너무 현실적인 현실에서 갑작스럽게 찾아올 판타지를 갈망한다. 이 영화는 열망을 위해 포스터를 마주하는 모든 이들을 새로운 판타지에 끌어들인다. 마치 실재할 듯한 동화를 미끼로 말이다.
네, 무슈 구스타브
영화는 영상의 미를 빼놓고는 논할 수 없다. 최초의 영화는 기차가 들어오는 장면을 촬영했을 뿐이었지만 시대가 흐를수록 사람들은 현실을 비현실적으로 편집할 수 있는 영상의 기술에 눈을 떴다. 그리고 각 구도와 색감이 주는 심리적 효과는 물론이고 화면이 전환되는 불과 몇 초로부터 비롯되는 속도감과 쾌감까지 연구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아름다움이란 지극히 주관적이어서 영상미는 감독에 따라 크게 좌우되기 마련이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감독 '웨스 앤더슨'은 왜인지 좌우가 대칭되는 정면과 정측면 구성을 참 좋아한다. 웨스의 첫 영화인 '바틀 로켓'에서도 이와 같은 장면 구성은 쉽게 볼 수 있다. 오히려 우리나라에서 흔히 사용되는 대각선 구도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다. 배우들에게는 다소 부담스러울 수 있는 이 방식은 웨스의 미적 기준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상징이다. 영화 리뷰를 쓰고 있지만 아직 영화를 그렇게 깊이 파고든 전문가는 아니기에 이제까지 이 상징이 어떤 평가를 받아왔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가히 웨스스러운 영상미의 정점을 찍은 영화라고 하겠다. 분명 감독이 평범한 인물은 아니니라 예상할 정도로 이 영화는 미친 듯이 좌우의 대칭과 인물들의 정면, 정측면 구도에 집착한다. 색감도 어디 하나 모나거나 어색한 부분 없이 신비롭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답다.
가장 현실적이고 싶어 하는 영화가 있다면 웨스의 영화는 절대적으로 영화이기에 가능한 화면들로 영화를 꾸린다. 영상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표현이 적절하겠다. 한 장면 한 장면을 당장 캡처해서 액자에 넣어도 어색함 없을 그림이다. 심지어 화면이 전환되는 속도도 일부러 빠르지 않고 차분해서 감정이 넘쳐흐르지 않고 모든 장면을 감상하도록 한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영화의 정점은 화면 비율이다. 시대에 따라 당대에 유행한 화면 비율을 실제로 적용한 발상은 웨스가 얼마나 광기 어린 감독인지 못 박아 증명한다. 누군가에게 그와 같은 영화를 찍어보라고 한다면 학을 땔 테다.
제로(Zero)입니다
사실 영화가 끝나고 내용이 무엇이냐 물으면 쉽게 대답하기 어렵다. 어리숙한 로비 보이 제로의 성장기? 마담 D의 살인범을 찾는 추리극? 전설적인 호텔 지배인 구스타브의 탈주극? 누구라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멘델 케이트의 전설? 딱히 손에 땀을 쥐는 긴장감도 없고 특정 인물의 심리나 감성에 깊이 젖지도 않는다. 관객 입장에서는 어디에 마음을 정착시킬 대상으로서의 주인공을 찾기 힘들다. 이는 감독이 현실감이 떨어지는 구도와 연출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감독의 영화가 부족하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 이 영화가 의도하고 있는 바다. 과하게 빠지지 말고, 심각하게 생각하려 들지 않아도 되는 영화.
영화는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시대를 배경으로 둔다. 세계에 있어서 가장 혼란스러운 시대 말이다. 하지만 구스타브는 'WILL THERE BE WAR(전쟁 발발)?'라는 대문 기사보다 'Dowager Countess Found Dead in Boudoir(미망인 백작부인 주검으로 발견)'라는 기사에 충격받는다. 그에게 전쟁보다 더 가까이 있는 현실이 존재하는 것이다. 전쟁은 수많은 사람의 일상을 파괴했다. 하지만 인간은 각자의 일생을 살아간다. 누가 뭐래도 그것은 주인공에게 가장 중요한 모험이다. 우리 모두가 자신의 인생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과 같이 말이다. 정권이 바뀌고 전쟁이라는 불청객이 끼어들기도 하지만 우선은 주인공의 독자적인 삶이 중심이다. 이에 덧붙여 전쟁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까지 반영한 결과 아름다운 호텔에서부터의 동화가 우리 마음에 들어온다.
살면서 뭔가를 한다는 것에는 큰 의미가 없어
삶은 눈 깜빡할 사이에 끝나버리거든
멜델 케이크. 우리는 번지르르한 겉면으로 각자의 살기를 숨긴다. 영화는 우리의 치열한 삶을 화려한 성장 스토리와 닮았다는 희망을 준다. 우리나라에서는 지치고 힘들 때 많이들 호캉스를 간다. 온몸의 긴장을 풀고 여유롭게 세상을 한 발 떨어져서 보기 위해서 말이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로의 호캉스도 다르지 않다. 인간 삶의 스펙터클함을 가장 정갈하게 포장한 영화로의 호캉스는 당신에게 얼마나 행복한 동화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