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칼라로의 진입
작년 말에 회사(IT 기업)를 그만두고 먹고살 길을 찾던 나는 우연히 사촌오빠가 타일공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뮤지컬 배우인 오빠가 생계를 위해 건설 노동업에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그 무렵 TV 프로그램 '세 바퀴'에 젊은 여자 도배사가 출연했다. 고학력에 높은 연봉을 받던 분이 하던 일을 과감히 접고 건설 노동업에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솔직히 그분의 학력이나 연봉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젊은 여자가 건설 노동업에 종사한다는 사실 자체에 마음이 끌렸다. 찾아보니 유튜브에도 '블루칼라' 업종으로 전향한 MZ세대에 관한 콘텐츠가 많았다.
특출 난 재능 하나 없는 내가 그래도 가진 것이 있다면 성실함과 근성인데, 그것을 무기 삼아 숙련공이 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얼핏 스쳤다.
보잘것없는 학력과 스펙을 지닌 내가 사무직으로는 도저히 월급 삼백 이상을 받아볼 수 없을 것 같으니까.
매일 지옥철에 몸을 싣고 동료들과 경쟁하고 절간 같은 사무실에 앉아 담배 하나 피우러 갈 때마다 눈치 봐야 하는 사무직이 싫으니까.
오늘 잘리면 내일 곧바로 대체 가능한 존재이고 싶지 않으니까.
미래에 뭐 해 먹고살지 하는 불안에 더는 떨고 싶지 않으니까.
기술을 배우자고 결심했다.
이쪽은 일머리가 없어도, 남들보다 좀 늦어도, 버티다 보면 언젠가는 '되는' 업종이라 한다.
검색 끝에 ‘도배’와 ‘인테리어 필름’으로 종목을 추렸다.
둘 다 배워보고 내게 더 잘 맞는 쪽으로 가자는 생각이었다.
국비 지원을 받아 작년 12월에 도배 학원을 수료했고, 올해 2월에 인테리어 필름 학원을 수료했다.
나는 도배가 더 좋았다.
칼질과 솔질로 뻗어나가는 손맛, 팀워크, 몸을 역동적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점이 좋았다.
필름은 도배보다 훨씬 개인적이고 섬세하고 세분화된 작업이라고 느꼈다. (결정적으로 여자가 필름계에 입문하려면 실측과 재단을 잘해야 하는데 난 그쪽으로 흥미와 소질이 없었다.)
마음을 정하고 곧바로 네이버 밴드를 통해 도배 신축현장 일자리를 구했다. 이제 일한 지 5일짼데 진짜 생각 이상으로 너무 힘들고 고되다. 현장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지 않아 계단으로 다녀야 하는데 계단에 난간이 없다. 자칫하면 삐끗해 추락할 것만 같다. 물이 가득 찬 양동이를 들고 계단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오르내린다. 집에 들어와 걸음 수를 확인해 보면 평균 2~3만 보 나온다. 매일 근육통에 시달리고, 허리 무릎 어깨에 파스 붙이고 다닌다. 이 악물고 버티고, 버티자는 일념으로 또 버티다 보면 점심시간이 오고 퇴근 시간이 온다.
벽지 옮기고, 물 데우고, 물통 나르고, 쓰레기 줍고, 정배하고, 팀에 적응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고 고통스러운 와중에 피로가 싹 씻기는 순간이 있다. 현장에서만 배울 수 있는 크고 작은 기술과 정보를 습득할 때, 잘 안되거나 느려도 내가 해냈다는 성취감을 느낄 때! 반쯤 내려온 눈꺼풀이 다시 말똥말똥하게 걷힌다.
그리고 팀워크.
도배 신축현장 팀워크는 그동안 다른 직업(바리스타, 사무직)에서 겪은 팀워크와 사뭇 결이 다르다.
신축현장은 위험하다. 팀원들과 스카이를 타고 고층을 오르내릴 때면 이대로 다 같이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창에 방충망이 없어 누군가 뒤에서 밀면 바로 추락할 것이다. 우마 위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대부분 도배사들은 칼, 공구 등의 연장을 지니고 있다. 이 말인 즉, 동료를 믿어야 한다는 얘기다. 몸을 부딪히면서도 서로 다치지 않도록 배려해야 한다는 얘기다. 생이 걸린 팀워크다. 나는 이런 팀워크가 좋다.
몸 쓰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본능적이고 감각적인 면이 두드러진다. 내가 그렇듯 말이다. 다른 현장들도 대략 이럴 것이라는 짐작이 든다. 동질감을 느낀다.
낯선 환경에서 낯선 사람들과 섞이는 일은 여전히 어렵다. 막내라서 눈치도 봐야 하고. 선배들은 현장이 바쁘고 위험하니 내게 톡 쏘듯 말할 때도 있고, 협업이다 보니 빨리 적응하라고 눈치를 줄 때도 있다. 그러면서도 내게 팁을 주고 시간을 들여 기술을 알려준다. 감사한 일이다. 힘들고 고된 초보 시절을 지나왔을 그들을 존경한다.
도배사로 일하지만 예전에 글 쓰던 가락이 있어 자판을 두드린다. 짬나는 대로 이곳에 내 일상을 기록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