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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편 "모든 전략이 다 그 모양 그 꼴이라면"

by 김듀키

그가 가리킨 곳엔 노래방이 있었다.






우리 주인님은 지구 설계 시스템 오류 덕분에 본인만큼 부지런하고, 건강하며, 능력 있는, 또 다른 자신을 만나 부자가 되었다. 뭐, 나도 똑같은 오류를 체험 중이긴 하다. 도움을 받거나, 정보를 공유해야 할 대상이 똑같이 무능력한 나라는 것이 문제지만.


그나저나 노래방에서 어떻게 작곡한다는 걸까? 이 허무맹랑한 아이디어를 듣고도 그를 쫄래쫄래 따라온 것은, 우리에겐 주인님 같은 튼튼한 치아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잇몸으로 세상을 씹어 보자는 이 세계의 나에게 마음이 동했다. 지금 나는, 그저 내 인생에 다시 재생 버튼이 눌렸다는 것만으로도 은은한 흥분감을 느낀다.

“자자… 수분은 충분히 준비되었고…”


그는 물과 이온 음료를 잔뜩 사 와서 테이블에 깔았다. 그리고 노래방 마이크에 커버를 씌우며 나를 흘깃 쳐다봤다.


“뭐해요? 휴대폰 꺼내 놓으시고. 여기 종이랑 펜 잡으시고.”


“폰… 폰은 왜요?”


“자, 여기 마이크 하나는 스피커로 쓰는 거예요. 폰에서 곡을 재생해 주세요.”


노래방까지는 긴가민가했는데, 마이크를 세팅하는 모습을 보며 명진명도 아주 후진 개체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디어가 나쁘지 않잖아?


뽕짝 뽕짝. 정신없이 후루룹따따 뽕짝 거리기만 하는 그 곡이 마이크를 타고 노래방 안에 울려 퍼졌다. 내가 만든 곡에 내가 정신이 없고 괴롭다. 잘못 만든 게 분명하다.


“이건 가사 안 붙인 파일이에요.”


그는 이따금 커다란 눈만 깜빡이며 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었다. 그리고 갑자기 매우 구성진 목소리로 첫 소절을 뽑았다.


“오메! 적당히 하소!”


내가 띠용한 표정을 짓자, 그가 잠시 음악을 멈췄다.


“요즘 제가 느낀 인생 한 줄 평. 또 뭔데? 계속 힘들게 해서 살기 싫게 좀 하지 마. 츳!”


그가 손날로 자기 목을 긋는 시늉을 한다. 금방이라도 인생을 들이받을 것처럼 패기가 넘친다. 평소에 좀 이렇게 살지… 까부는 그가 안쓰럽다.


“아하하… 네…”


“당신, 출신이 어디?”


그가 능숙한 진행자처럼 질문하며 마이크를 내 턱 밑으로 갖다 댔다.


“저요?”


“네. 지방 출신입니까?”


“그, 그렇죠. 목포… 전남 목포요. 아? 아! 그럼, 그쪽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돈 없는 지망생이 꾸역꾸역 서울에서 살아야만 하는 이유. 그도 지방 출신이었구나.


“가사 없이 멜로디만 들어보니까, 이 곡에서 뭔가 애환이 느껴진단 말이죠? 뽕짝 거리는 멜로디지만, 트로트 장르에서만 느낄 수 있는 슬픔이 분명히 있다고요. 그래서 적당히 하라는 소절이 떠올랐는데… 어떤 것 같아요?”


“뭔가... 직설적인 게 더 확 와닿는 느낌인데요? 신나는 가사는 아닌데… 오히려… 사투리라 그런가? 애잔한 것 같기도 하고? 웃긴 것 같기도 하고요.”


“그렇죠! 그 감정이 더 맞는 거 아니에요? 지금 그쪽은 신나는 일이 하나도 없잖아요.”


그렇다. 30대에 들어선 이후로 지금이 가장 신나는 순간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가슴이 뛰고, 발가락이 춤을 춘다. 발가락이 까딱거린다는 건, 내향형 인간이 밖에서 끌어올릴 수 있는 흥의 최대치다. 아침엔 조금도 신나지 않던 그 노래가, 지금 신발 속의 발가락을 춤추게 하고 있다. 겨우 가사 한 줄 달라졌을 뿐인데…!


“아까 가사 붙인 음원 들었을 때, 메시지가 나쁘진 않은데… 뭔가 딱딱한 느낌이 있었거든요. 사투리로 써보는 건 어때요?”


“사, 사투리요?”


이건 정말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전개다. 음원 시장 니즈도 못 맞추는데, 사투리까지? 뚫고 들어가야 할 구멍이 더 좁아진 느낌이다. 실에 침을 바르고, 두 눈알이 중앙으로 몰려 마침내 혼연일체가 되어도 내 노래는 대중의 마음을 통과하지 못할 것만 같다. 그런데 이상하게 해 보자는 결심이 치솟았다.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전략이 다 그 모양 그 꼴이라면. 사투리 하나 곁들이는 게 무슨 대수랴. 이 터무니없는 결심은, 최근 내게 일어난 다중우주보다 더 판타지 같은 일이었다.


“자, 이제 만들어 보시죠.”


“네…!”


이 막막한 기분. 나도 안다. 이 기분을 이겨내야만 내 인생에서 다음 이야기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을.


“코딱지송 만들었을 때 기분을 떠올리면서 써보세요. 이것 참… 남의 인생은 이렇게 잘 코치하는데…! 내 인생은 왜 코치가 안 되지?”


그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저 버릇까지 똑같네. 스트레스를 받으면 순간적으로 머리에 열이 올라 간지러움을 못 참는 것까지, 우린 꼭 닮아 있었다.


나는 그가 노래방 카운터에서 얻어온 종이 2장과 펜을 잡았다. 임시 거처에 불과한 이 작업실이 그 어느 곳보다 아늑하게 느껴졌다. 정신없이 뽕짝 거리는 곡이 세상 그렇게 차분하게 다가올 수 없었다. 내 안에서 어느새, 자신감이 차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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