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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산심해 멸절기

기운의 조각들

by 하성운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려 보냈다. 살갗 위로 닿을수록 온기가 슬금슬금 올라왔다. 바깥은 지독하게 서늘해서 이곳에서 한시라도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몸을 웅크려 제대로 된 온기가 도사리는 곳에 본인도 모르게 의식이 꿈의 상태로 전환된다.

한 빛으로 태어나고 또 다른 한 빛과 첫걸음마를 떼었다. 곧바로 달리기를 시작하자 어느 실오라기 같은 안개가 시야를 가리기 시작했다. 작지만 집요하게, 될 듯 안 될 듯 계속해서 성공을 방해했다. 처음엔 본인만을 탓하며 혼자만의 시간을 수없이 갈고닦았다. 하지만 허상 같은 시간이 흐를수록 주저앉는 빈도만 늘어졌다.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는 게 이게 참으로 서럽고 답답한 일이구나,라고 되새기며 머리를 짓물렀다. 그리고 의지를 포기한 것처럼 마음속 벽을 허물었다. 방어기제가 사라지자 이제까지 무시했던 의미들이 가슴속에 흘러 들어왔다.


‘영광 향한 나그네여 궁핍하고 곤 하나, 모든 문제 이 약속이 해결하여 주신다. 세상이 너를 인도하리, 눈으로 인도하리, 영광 향한 나그네를 눈으로 인도하리’


그렇게 다음 기적이 올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곧이어 안 보이던 것들이 제 발로 정보를 싣고 본인 앞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번엔 놓치지 않고 전부 다 바라보았다. 빛들은 어떤 식으로 걷고 뛰는지, 언제 쉬고 다시 시작하는지 눈앞에 펼쳐진 기적이 모든 것을 세세하게 가르쳐 주었다. 예전에 했던 고민이 무색하게 순식간에 뛰어올랐다. 예전보다 훨씬 가볍고 안정적인 발걸음에 더 이상 본인의 의지는 남아있지 않았다. 아무 이유 없이 앞으로 한 발짝 더 가보았다. 뭐가 그렇게 어렵고 간절했던 것인지 이제는 한없이 작아진 허망함을 달고 주어진 길을 향했다.

본인을 낳고 기른 창조주는 말없이 그 모든 광경을 지켜봤다. 본인이 그 일을 해내는 날이 오면 일생에서 겪어보지 못한 금보다 귀한 시간이 본인을 기다렸다. 찰나가 신나고, 재밌고, 또 다른 날이 기대되고, 늘 예고 없이 고비는 찾아오고, 같은 과정을 반복하는 나날들이 지속되다 보면 어느샌가 본인이 또 다른 기적이 돼있었다. 창조주는 그 순간을 끝까지 기다리다 늘 그랬던 것처럼 소리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가 남긴 기적이 새로운 세상을 맞이했다. 하지만 모든 생명체가 이와 같은 아름다운 과정을 겪는 것은 아니었다. 언제나 예외는 있었다. 현관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나가거나 들어오는 소린데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보니 매정하게 인사도 없이 나갔는가 보다. 잠깐, 셋 중에 누가? 윤슬은 덮고 있는 이불을 확 젖히곤 우당탕 굴러 떨어졌다. 나래가 그 모습을 보고 아랑곳하지 않게 물 잔을 들이키며 말했다.


“쟤 지금 말도 없이 나간 건가, 가출한 거야?”

“너 무슨 짓 했어?”


윤슬이 넋이 나간 채로 현관문을 바라보며 본인 머리를 쥐어뜯었다.


“무슨 짓은 네가 했겠지, 너 잘 때 진짜 시끄럽던데. 베개로 틀어막으려다 참았다 진짜”

“승학이를 찾으러 가야겠어!”

“아니, 쟤가 첫 심부름 가는 유치원생이냐? 똑똑한 애니까 어련히 잘하시겠지, 넌 이리 와서 빨래 너는 거나 도와”


나래가 윤슬을 발로 까며 세탁기가 있는 곳까지 굴렸다. 윤슬은 대굴대굴 굴러가다 문지방에 턱, 걸리곤 그대로 기절한 척 코를 골았다.


“커어억..”

“아니 이 자식?”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과 합류한 승학의 손에는 양손 가득 봉지가 들려 있었다. 승학은 윤슬이 베란다 밖에 비꼬면서 귀엽게 찡찡거리는 모습을 지나 부엌으로 향했다. 한바탕 난리를 치고 다시금 평화가 찾아왔을 때 자연스럽게 불편함이 스며들었다.

“요리할 줄 알았으면 진작에 말하지. 이제 다 태운 계란말이를 처먹지 않아도 되잖아?”

나래가 밥을 주걱으로 꾹꾹 눌러 담으며 말했다. 어제 깨작깨작 먹던 모습과 다르게 자리에 앉자마자 주저 없이 눈앞에 음식들을 흡입했다. 내심 꾸역꾸역 삼시 세 끼를 다 만들어주려 했던 나래의 노력이 가상하고 웃겼다. 나래가 볼이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채로 승학을 노려봤다.


“뭘 웃어”

“아냐 많이 먹어”

“다음에는 같이 가”

“어디를?”

“장 보는 거, 놀러 가는 거, 이제 셋이 같이 가자”

윤슬은 그 말에 화들짝 놀라 나래의 등짝을 탁탁 맞장구를 쳤다. 밥을 다 먹고 난 후 셋은 진지하게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았다. 앞으로 어떻게 해나갈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차례였다.


“그래. 돈 없고, 빽 없고, 신분 없는 가출 청소년들이 어떻게 하면 생산활동을 통해 소득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한 좋은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이 있니?”

“우린 사람이 아니니까 돈 같은 거 필요 없어!”

나래가 윤슬의 볼을 잡고 양옆으로 늘리며 설명했다. 그대는 모르겠지만 승학과 본인은 16년 넘게 자본의 냄새로 숨을 쉬며 이미 돈이 인격이고 인생인 가격표가 붙은 사람들이라고 했다. 인간의 지위, 인권은 다 자본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며,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다면, 그건 돈이 부족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승학이 손을 슬며시 들고 용기 있게 의견을 내보았다. 살면서 한 번쯤 생각해 볼 만한 소재였다. 하지만 흔해 빠진 대답은 이들에게 있어 시원하고 명확한 답이 아니었다. 나래는 핵심부터 찔러보기로 했다.

“우리가 사람들한테 뭘 제공할 수 있을까?”


이번엔 윤슬이 승학을 따라 손을 번쩍 들어보았다.

“꿈과 희망?”

“그래, 좋은 의견이야”


승학은 혹시라도 나쁜 쪽으로 빠지질 않길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답변을 계속해서 던져봤다. 결국 다 마음속에서 거부당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다 같이 머리를 감싸고 끙끙대자 누군가 아이스크림을 꺼내 들었다. 달콤한 무의식 속 향연이 지나가고 순간 윤슬이 재채기를 했다. 건물 전체 조명이 밝게 반짝였다. 그리고 둘은 동시에 윤슬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가슴속 어딘가에서 아주 작은 스위치가 눌린 듯했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뭔가가 시작된 듯 긴장과 설렘을 가득 실은 기류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한 명이 신이 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한 명은 받아 적을 준비를 하고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외계대행소- 골치 아픈 문제를 외계 루트로 한 번에 해결해 드립니다. 사람 대신 기적을 만들어주는 대행 서비스’ 나래가 적은 기획안을 보곤 승학은 조용히 노트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걸.. 사람들이 믿어줄까?”

“이보다 혁신적인 사업 아이템이 어딨어?!”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물건처럼 쓰는 건..”


나래는 오른손을 가슴에 얹더니 이내 비장하게 읊었다. 윤슬은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의 실질적인 주인이 될 것이다. 윤슬이 뺨을 후려치며 알아듣게 설명하라 하니 모든 일의 결과물이 다 네 것이라고 말했다.

얼마 후 pc방에서 이들은 열을 올려 회의를 진행했다. 윤슬이 능력을 설명하고, 승학이 응용 사례를 만들고, 나래가 가격을 정리했다. 1인 템플릿으로 만든 어딘가 휑한 웹사이트 문구는 이러했다.





이를 본 나래는 만족한 듯 승학과 윤슬의 손을 잡고 흔들며 말했다.


“세상에는 돈은 많은데 심심한 사람들이 널렸잖아, 그런 사람들을 노리는 거야”

***


“아무리 머릿속에 화려한 이미지가 있다 해도, 그걸 표현할 자료가 현실에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요. 쌤들은 하나같이 자료 참고만 하라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주지도 않아요! 맨날 옆자리 애랑 비교만 하고, 정말 답답해요”


벽에는 색이 바랜 풍경화가 삐뚤게 기대어 있었고, 구겨진 스케치북과 엎질러진 연필 깎기들이 미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4평 남짓의 창고는 아무런 세계를 담고 있지 않아 이들이 벌일 행위에 적합한 공간이었다. 나무 받침대가 하나둘 떨어지고 둘 사이의 좁은 간격이 미세하게 틀어지기 전에

“감 잡았어요. 당신 안에 머물던 예술의 빛이 현실로 피어나길 바라요. 자자, 살짝 따끔합니다”

윤슬은 희망자의 미간을 짚었다. 이상하게 마음이 가벼워지면서도 서늘했다. 생전 처음 맛보는 상쾌한 기류가 좁은 창고 안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치 숲의 존재들이 의식의 흐름을 바람에 맡기듯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곧이어 무언가 오래된 어떤 감각이 머릿속을 덮었다. 당황스럽지만 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영적인 시야가 트이자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했던 오래된 감정이 깨어나 본인을 마주했다.


“우와우와 미쳤다, 진짜로 외계인이에요?!”

“만족스러우셨다면 별점 다섯 개에 리뷰이벤트 부탁드려요”


혼자서 환상을 더 감상할 수 있게 자리를 비켜주곤 손에 담긴 두둑한 지폐뭉치를 옆에 건들거리는 사람에게 건네주었다. 받은 사람은 화려한 손놀림으로 정확한 액수를 세고 씁쓸한 표정으로 다시 돌려주었다.

“잘 해결하고 왔어?”

“응,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줬어”

“수고했네. 아, 그 녀석은 다음 희망자랑 상담하고 있어. 근데 상담하는 사람 족족 다 울더라? 뭐 평소에 힘든 게 많았나, 암튼 꼴 보기 싫어”


둘은 멍청한 표정을 짓는 선생을 지나쳐 학원 밖으로 나섰다. 밖은 하늘빛 바람이 은은하게 싱그러움을 싣고 건물 사이를 활보하고 있었다. 이제야 뭔가가 시작되는 느낌이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돼 있었던 것이 경쾌하게 생겨나기 시작했다. 가슴 부근이 이상하게 울렸다. 익숙하지 않은 떨림이었다. 설렘도 공포도 아니었다.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오, 나도”


해가 제자리를 떠나가고 습기 가득한 여름밤공기가 수평선 위로 내려앉았다. 일을 마친 둘은 깜빡거리는 주홍빛 가로등 아래 기대어 콘 아이스크림을 홀짝였다. 아직 이 어색한 침묵을 견디지 못한 나래가 머리 위로 흩날리는 나방들을 손으로 휘저으며 물었다.

“그래서..왜 이 일 하는 거 찬성했어? 어쨌든 너로 돈 벌겠다는데. 나였으면 기분 나빠서 튀었겠다“

윤슬은 과자 밑부분을 삼킨 후 나래를 바라봤다. 가로등 빛에 반사되어 오늘따라 안광이 더 돋보였다.

”재밌는 것 같아! 어딘가에 소속돼서 그 일에 헌신적인 행위 자체가 말이야. 상대가 너희라 더 좋아. 내가 도움이 돼준다는 사실 자체가 무척이나 기뻐“

”힘들진 않아?“

”처음 시작하는 일들은 다 힘들지“


나래는 내심 퉁명스럽게 내던지고 싶어졌다. 아이스크림은 윗부분 그대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럼, 바다로 돌아가면 되잖아. 같이 갈 반려도 있으면서”

“평생 사람으로 살아온 애가 그 넓은 곳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 절대 불가능할걸. 난 그런 거 기대 안 해. 자기가 살아온 모든 걸 버리고 다시 첫걸음부터 시작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통수를 후려 맞은 것처럼 얼얼했다. 스스로 가족이라고 칭했던 절대 떨어지지 않을 것 같던 그 둘이 각자 삶을 살러 떠난다니,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너도 그럼 승학이 맞춰주면서 살 생각 없는 거야?”

“응, 그럴 생각 없어. 각자 원하는 삶이 있는 거니까, 난 걔가 따라오지 않더라도 바다로 돌아갈 거야”

“뭐? 그래? 그렇구나..”


***


“이제야 오다니! 참으로 빨리도 오시는군요, 그래도 와주셔서 감사해요!”


희망자는 떨리는 손으로 윤슬의 어깨를 흔들었다. 애써 가라앉힌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제가 아직 어려서 능력을 아주 크게 쓰면 하루에 한 번밖에 못 쓰거든요. 화가 나셨다면 미안해요”

“아니요? 이렇게 귀엽게 생기신 분한테 화라니요, 가당치도 않은 소릴!”


도심의 밤 속 누군가의 깃발과 함성이 대합창단을 이뤘다. 그러다 눈에 띄는 한 무리를 발견했다. 차가운 도로 위에 한없이 작지만 분명한 존재감을 가진 꼬물이들이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주위로 다들 주먹에 뭔가 하나씩을 쥐고 정해진 구호를 외치고 있었지만, 꼬물이들은 자신들만의 무기를 잃고 전의를 상실한 듯 보였다. 나래는 본인보다 장황한 소음을 못 이겨 먼발치에서 귀를 틀어막고 인상을 찌푸렸다. 윤슬은 양쪽 어깨에 놓인 떨림을 감싸 안고 내용을 재차 다시 확인했다.


“그래서..이 응원봉을 밝혀주면 되는 건가요?”

“뒤에 모인 이 사람들 전부요! 티무산에서 샀더니 몇 시간 만에 픽-꺼져버리는 거예요. 다들 흥이 식어버리기 전에 얼른 다시 불을 켜야만 해요!”


불이 꺼진 곳은 우주 속 블랙홀처럼 그 공간 하나만이 공허하고 모든 마음을 집어삼키는 것 같았다. 윤슬은 귀찮으니까 한 번에 다 처리하자며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누군가가 숨을 깊게 들이켰다. 다들 손끝이 가볍게 떨렸고 말은 오가지 않았지만, 마음이 묘하게 하나로 맞닿고 있었다. 불이 꺼진 이들이 서로를 붙잡고 뿌리로 얽히자, 투명한 푸른빛 실 가닥이 땅 위로 흐르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별빛이 실로 뭉쳐진 것처럼 수천만 가닥의 빛줄기가 사람들을 감싸 안았다. 그 빛줄기들은 각각 행과 열을 맞추어 형형색색의 빛을 만들고, 각자 개성에 맞게 휘날렸다. 자신에게 생겨난 빛에 사람들은 동시에 고개가 솟아올랐다. 한 명이 환희가 담긴 비명을 지르자 너나 할 것 없이 곳곳에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나래는 희망자 손에 든 돈봉투를 가로채고 잽싸게 윤슬과 함께 그 현장을 빠져나왔다. 윤슬은 사람들을 향해 한껏 웃어 보이다 점점 멀어지는 환희에 살짝 아쉬워 물었다.

“넌 저 사람들과 함께 하지 않아?”


순수한 물음에 최대한 솔직해져 보기로 했다.

“뭐, 사람들끼리 뭉쳐서 커다란 변화를 일으킨다는 건 경이롭다고 생각해. 근데 귀가 예민한 사람은 저 열의에 참여할 수 없어”

“하지만 사람은 모일수록 즐겁잖아!”

“꼭 그 공동체에 어울릴 필요는 없어. 자기 주관을 지키는 사람이 무엇보다 멋지다고 생각해. 난 너희들이 있으니까”

그것 참 멋진 말이네! 아이스크림 먹을래?”

“..그래?”


익숙한 얼굴의 편의점 직원과 작은 인사를 나눈 뒤 어제와 똑같은 장소로 향했다. 가는 길에 나래는 옆을 흘깃 쳐다보았다. 별안간 네가 속한 외계인 집단은 왜 군집생활을 하지 않느냐 묻고 싶어졌다. 윤슬은 손에 든 아이스크림을 입에 갖다 대려다 순간 손을 멈추고 이내 말했다.


“우리 종족은 각자의 자유를 중요시해. 서로 속박하지 않지만 방임하지도 않아. 가는 길에 만나는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를 더 나은 존재로 이끄는 것이 우리들의 긍지야.”


어느 순간 이들의 앞에 불 꺼진 상가 건물이 자리 잡고 있었다. 1층 카페는 손님들이 다 떠나가고 직원으로 보이는 한 명만이 어제와 같은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승학은 맞은편에 앉아 혼자 일방적으로 말을 걸고 음료를 홀짝이기를 반복했다. 윤슬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한입에 퍼지는 유럽을 베어 물었다.

“인간은 툭하면 울고, 쓰러지고, 화가 날 정도로 나약해서 서로에게 약점이 붙잡혀 의지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어. 아마 나 같은 이상적인 존재가 ‘완전함’을 꿈꾼다면, 현실적인 인간은 ‘안전함’을 꿈꾸는 거일지도 몰라.”

“..그래서?”

“꿈의 결이 다른 이들은 서로 결핍을 채우고 난 뒤엔 결국 각자의 길로 흩어질 수밖에 없을 거야”

“그럼, 저 애가 혼자 자립할 때까지 옆에 있다가. 나중엔 다 헤어지게?”


윤슬은 바삭바삭 소리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시선은 계속 한 곳만을 바라봤다.

“벌써부터 차였네, 불쌍한 자식”

“난 한눈에 봐도 알아. 걔는 나와는 정반대로 살아와서 절대로 나한테 맞춰줄 수 없을 거야. 그 애는 인간이니까.”

“아, 그래?”


건물 속 빛이 완전히 사라졌다. 곧이어 승학이 나오고 우는 희망자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윤슬이 승학을 향해 똑같이 손 흔들었다. 나래가 떠나가는 희망자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뭐라 말했길래 만나는 사람 족족 저렇게 질질 짜냐?”


승학이 어설프게 아이스크림을 받으며 어깨너머로 시선이 흘렀다. 방금 있었던 일은 크게 특별하지도, 기억에 남을 만한 순간도 아니었다.


“그냥.. 무작정 공감해줬지”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뭐라 했냐고?”

“댁이 잘못한 거 하나 없고, 그 사람들이 이상한 거다, 뭐 이런 얘기들”

“의외로 적재적소가 있네?”

“재능 있는 것 같아?”

”당연하지. 너 방금 3시간이나 시달리고 왔어 “

***


“진짜로 사람 납치하는 일은 안 받아?”

“죄송합니다. 해당 행위는 뒷수습이 어려워서요”

“아아, 안 되면 말든지. 나 참, 진작 말할 것이지 괜히 기대했네.”

상담도 받지 않고 급하게 현장으로 부른 이유가 이것 때문이냐, 나래는 한껏 짜증을 냈다. 본인보다 썩어빠진 또래는 오랜만에 본다며 나머지 둘에게 이만 돌아가자고 했다. 승학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윤슬은 희망자를 향해 인상을 찌푸렸다. 무대 세트장 쪽으로 관객이 몰리기 시작했다. 유일하게 입구로 나가는 사람은 이들 셋만이었다.


“아직 말 안 끝났는데?”


희망자의 한마디에 다들 빡쳐서 발걸음이 저절로 멈췄다.

“조명만 좀 손봐줘”

방금까지 사람 납치를 말하던 녀석이 지금은 조명만 손봐달라니, 급격히 평범해진 요구에 셋은 어안이 벙벙해질 수밖에 없었다. 희망자는 점점 더 인원수가 많아지는 관객을 피해 부랴부랴 무대 아래 공간에 이들을 꾸겨 넣었다. 희망자는 협소한 공간 아래 궁상맞게 주저앉은 이들을 보며 말했다.

“무례하게 군 건 미안한데, 도움이 필요해요. 노래 하이라이트 부분이 되면, 무대 조명 전부를 내가 있는 쪽으로 몰아줘요.”


희망자의 어깨를 밀치며 무대 밑에서 빠져나온 나래의 손에 지폐뭉치가 쥐어졌다.

“다른 보컬들은 누구 하나 때문에 좋은 기회 다 날리겠네”

“걔들은 다 인맥빨이에요. 진짜 실력으로 들어온 게 아니란 말이에요, 값은 두 배로 낼 테니 요구한 거나 제대로 들어줘요. 먹튀 하면 진짜 안 돼요, 그거 내 전재산이란 말이에요”

“걱정 하덜덜 말아요. 모두 다 너 같은 양아치가 아니세요”


셋은 맨 앞줄로 몸을 욱여넣었다. 그 짧은 몇 초간 오만가지 감정이 담긴 욕설 소리와 신체를 맞대는 소리가 간신히 붙잡고 있던 정신 줄을 끊어놓았다. 그리고 코끝을 자극하는 담배 연기와 향수 냄새가 이대로 돈을 들고 튈까라는 생각을 들게 했다. 자욱한 안개가 무대에 내리 앉았다. 조명이 무대를 파고들고, 말없이 연주가 시작되었다. 순간 사람들의 함성이 누군가를 가리켰다. 센터 쪽에 잘생긴 꼬물이가 어색하게 음을 맞추며 화려하게 손을 휘저었다. 기색에 비해 소박한 퍼포먼스였다.

그럼에도 이 무대가 듣는 이의 귀를 완벽하게 정화시키는 이유는 무대 뒤쪽에서 화음을 얹으며 드럼을 빈틈없이 내려치는 희망자 때문이었다. 셋은 알 수 없는 자부심에 사로잡혀 희망차게 희망자의 이름을 외쳤다. 그 소리에 희망자는 셋이 있는 곳을 향해 손으로 신호를 보냈다. 나래와 승학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윤슬은 이다음 희망자의 순간이 올 거라는 걸 단숨에 알아챘다. 그의 그림자는 흐릿했고, 무심한 표정이었지만 분명히 진심이 흐르고 있었다. 곧이어 모든 소음이 정적을 맞이하고, 선두로 나서는 이가 주인공이 되는 순간, 희망자는 손을 번쩍 들어 올려 주먹을 쥐어 보였다. 그리고 힘차게 내리쳤다. 극장 안에 모든 관심이 단 한 사람에게 쏠렸다. 한 음 한 음이 쌓일수록 그에게 다가오는 빛이 점점 늘어났다. 분위기에 휩쓸려 내뱉는 함성은 잦아들고 모두가 진심으로 그를 향해 외칠 때, 파란 불빛이 모든 조명을 그에게로 이끌었다. 자기편이 활약하는 모습은 그 어떤 때보다 짜릿한 일이었다.

그 최상의 상태에서 모든 공연이 끝난 후 희망자의 표정은 진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희망자는 한껏 들뜬상태로 셋을 테이블에 앉힌 뒤 비싼 안주를 마구 시켰다.


“진짜 뒤지게 고마워요. 그게 내 마지막 공연이었거든요. 앞으로 평생 잊지 못할 순간일 거예요”


홀린 듯이 고기 안주를 뜯는 둘을 뒤로 승학이 물었다.


그럼..밴드는 그만두시는 거예요?”

“네, 이제 취업할 나이라서요. 이런 성격에 잘할 수 있을진 모르지만요. 하지만 어릴 때 한 번이라도 좋은 추억이 있으면, 그 기억으로 버티면서 살아가곤 하잖아요?”


그 말에 승학은 윤슬을 바라봤다. 세상 저렇게 만족스럽고 행복한 모습을 본 적이 없다. 희망자는 승학의 시선을 따라 윤슬을 빤히 바라보다 시선을 유지한 채 물었다.


“저 애랑 얘기 좀 나누고 싶은데, 잠깐 저기 좀 같이 가도 될까?”

“당연히 안 되지, 우리 애를 왜 데려가?”


나래가 윤슬을 꽉 껴안으며 희망자를 노려봤다.


“나쁜 짓 하려는 게 아니야. 궁금한 거 몇 개만 좀 물어보려고. 너희들 보는 앞에서 할게. 30분만 기다려줘”


승학은 의심의 눈초리에 조심히 손을 갖다 댔다. 곧이어 윤슬을 감싸고 있던 팔에 힘이 스르륵 풀렸다. 윤슬은 문제 같은 거 없을 거라며 둘의 머리를 쓰다듬고 희망자를 따라나섰다. 희망자는 멀지 않은 곳에 윤슬을 세워 곧바로 질문했다. 나래가 곧바로 귀를 허공에 가져다 댔지만,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의 애매한 거리라 둘이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알 턱이 없었다. 희망자의 입모양이 윤슬의 머리에 교묘하게 가려져서 어떤 단어가 나오는지 유추해 볼 수도 없었다. 그만 체념하고 눈앞에 인간과 대화나 나눠보기로 했다. 어색함이 시작되기 전에 승학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이 일을 하기 전에는 뭘 하려고 했어?”

“뭔가 기분 째진다, 이런 애들 장난 같은 짓도 일이라 쳐준다니. 학교에서 영화 시나리오를 썼어”

“완전 의외다”


나래는 아무 표정 없이 음료를 들이켰다. 그리고 자세를 편하게 바꿨다.

“왜 그만둔 거야?”

“그냥.. 딱 시작하려던 즈음에 영화제 예산이 삭감됐길래”

“뭔가 아쉽다. 그래도 열심히 했을텐데”

“아쉽긴, 애새끼들 말귀도 다 못 알아먹고 인성질 하는 꼴이 토악질 나와서 차라리 그만둔 게 다행이었지. 예산 다 사라지고 난 후에 우리끼리라도 계속해보자는 의견이 나왔는데. 그냥.. 돈도 안 되고 사람들한테 정이 너무 떨어져서 그대로 나왔어”

그렇구나, 저기 아이스크림 있던데 먹을래?”

“단 거 안 좋아해”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 윤슬의 표정엔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정말 형식적인 질문만 오간것이다.

나래는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조금만 참으면 나타났을 해답을, 기다렸으면 생겼을 희망을 계속 놓치고 있던 것은 아닐까, 만약 학교를 계속 나갔더라면. 어른들은 이런 애를 보면서 좋은 나날을 놓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그들이 그런 나날들을 하나씩 놓치게 하고 있다. 무심하게 넘겨짚었던 사소한 문제들, 허무하게 흘러낸 소중한 기회들이 결국 사람을 기다리고 있을 좋은 나날들을 맞이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버린다.

다같이 가게를 나와 가로등 불빛에 의존하며 거리를 활보했다. 나래는 자신을 앞서가는 이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결국 우리가 어른이 된 이후에도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을 거야.


“희망자랑 무슨 얘기했어?”

“다음 일거리! 이번엔 두둑하게 챙길 수 있을 거야!”

“하하,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운 거야”

나래는 얘네를 보고 저절로 마음속 깊은 곳 어디에서 확신이 들었다. 절망이 가득한 삶 속에 한 줄기 희망이 드리우면 그건 그거대로 이야기를 이어나갈 의지가 생기게 될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변덕으로 생긴 변수가 이토록 기적을 가득 싣고 본인 앞에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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