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더벅머리514, 하성운
눈앞에 커피가 엎질러진 것처럼 혈이 쏟아져 나올 때 처음으로 뱉은 말이었다.
"시발."
머릿속에 떠올리는 단어가 그것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누구라도 이 상황을 이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눈앞에 엎질러진 혈이 점점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차가운 냉기와 코를 찌르는 냄새가 발가락을 타고 발등을 탄다. 점점 타 올라온다. 숨이 점점 막혀오기 시작한다.
끝이 없는 바다에 빠진 듯한 느낌이다.
숨이 끊어질 것만 같다. 피가 온몸을 타오를수록 숨이 턱턱 막히고 미칠 것 같다.
시체였다. 다리 한쪽이 잘려나가고 온몸의 뼈가 뒤틀린, 어깨 부근은 불에 그을린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괴이하게도 얼굴 쪽은 너무나 깔끔하다. 찰랑이는 금발의 여성, 콧대가 인상적이게 곧고 눈꼬리가 물고기 지느러미처럼 길게 내려가있는 상당히 관리가 잘된듯한 모습이다.
그런 사람이 어쩌다 이런 봉변을 당했는지 예상조차 가지 않는다.
등 뒤에서 서늘한 공기와 함께 박수소리가 스친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보고 감탄하며 손뼉을 친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완전히 홀린 눈빛이었다. 그들이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를 보듯 푹 빠져 있다.
그때 한 중년의 콧수염이 진득한 남자가 손을 든다.
"이 작품을 내가 사겠소, 나의 죽은 아내의 젊은 시절을
보는 것 같군 정말 아름다워."
하지만 아무도 그의 말에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모두 그녀를 탐내는 듯한 눈치였다. 한바탕 소란이 휩쓸고 지나가자 기다렸다는 듯 누군가가 커튼을 열고 나타났다.
"바로 내가 이 작품을 전시한 장본인이오!"
그것은 토끼였다. 그는 푸른색 정장을 입고 시계를 가리키며 활짝 웃는 표정이었다. 모두가 당황한 눈치였다. 당황은 곧 황당함으로 바뀌었고, 이내 모두가 입을 맞춘 듯 똑같은 말을 반복해서 외쳤다.
'누가 이따위 장난질을!'
토끼는 깔깔 웃어대며 말을 이어갔다.
"그대들은 이 지구상에서 가장 모순적인 생물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토막 난 시체를 길거리에서 발견했다면 그 즉시 헛구역질을 하며 마차의 방향을 돌릴 그대들이. 단지 한 부분이 아름답다는 이유로 예술작품 취급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똑같은 시체일 텐데, 어떻게 그런 다른 반응이 나올 수 있단 말입니까!"
누군가가 토끼의 말을 끊고 돌을 집어던졌다.
"이런 미친 작자 같으니! 저건 토끼의 탈을 쓴 산인자다!"
술병이 깨지는 소리, 뛰다가 레이스를 밟아 옷자락이 찢어지는 소리, 구두굽이 수만 번 찍히는 소리가 아득히 공간을 메워갈 때쯤 전시장의 문이 열렸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문밖을 향해 달렸고, 토끼는 뒤꽁무니를 빼는 그들을 보며 깔깔 웃어댔다.
"하하하-! 누가 토끼고 사람인지 모르겠군!"
모두가 떠난 것 같았던 빈 전시장 한가운데
중년의 콧수염이 진득한 남자는 그녀의 곁을 지켰다.
남자는 여자의 두 볼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삼켰다.
"난 당신이 어떠한 사람이라도 끝까지 곁을 지키겠소."
남자는 여자의 얼음 짱처럼 차디찬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 광경을 지켜본 토끼는 흥미로웠다.
"저딴 시체 덩어리가 뭐 그리 좋다고 입술까지 맞춰대고 지랄인가."
토끼는 남자에게 말했다.
그 여자가 그렇게 좋다면 그 여자를 한 톨도 남기지 말고 쳐 먹어
"뭐..."
남자는 놀라 다시 한번 물었다. 그의 물음에 토끼의 얼굴은 미소로 번졌고, 곧이어 답했다.
"그토록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그녀의 아름다운 다리, 팔, 가슴, 엉덩이, 두개골, 찰랑이는 금발 네가 어루만지던 두 볼 모조리 다 처먹으라고. 그게 바로 그녀를 진정으로 느낄 수 있는 방법이야."
'정말로 그녀를 사랑한다면 처먹어.'
남자는 놀란 것도 잊은 채 그녀를 먹기 시작했다. 남자는 발가락 하나하나부터 발등을 타고 다리에서 배로, 그리고 가슴으로. 남자의 시선이 천천히 올라갔다. 그는 그녀를 음미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는 눈물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황홀한 맛이야."
남자의 얼굴은 그녀에 대한 황홀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두 볼은 붉게 달아올랐고, 입가에는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탕-!
남자는 토끼가 쏜 총에 맞아 죽었다. 토끼는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혀끝을 내밀어 시체 두 구를 맛보았다. 곧이어 입 사이로 손을 집어넣더니 헛구역질을 하며 벌레를 토했다.
"우욱, 정말이지 이딴 걸 왜 처먹는지 모르겠어. 인간들은 단체로 머리에 총을 맞은 게 아닐까?"
바닥에 쏟아진 벌레들이 한 군데로 모이기 시작하더니, 아이의 형상으로 변했다. 토끼는 눈이 휘둥그레진 채 아이를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그대!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것이오?"
아이는 제 손과 발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덩달아 놀란 표정으로 답했다.
"나는 그대가 목을 졸라 죽이지 않았습니까?"
토끼는 뒷걸음질 쳤다. 아이는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방금은 총에 맞아 죽었고... 그래, 난 분명 레이첼이라는 여자였고, 메르헨 이라는 남자였어."
아이의 시선이 토끼에게로 향했다. 분노로 가득 찬 표정이었다. 곧이어 토끼의 목을 조르며 아이는 외쳤다.
"네가 날 죽였어! 너 따위가 날 죽였다고!"
토끼는 괴성을 지르며 괴로워하다 이내 정신을 잃고 말았다. 화가 풀리지 않은 아이는 토끼의 가죽을 벗겨 자신이 입고 내장을 끄집어내어 벌레들의 먹이로 던져주었다. 토끼의 살점을 먹은 벌레들은 작은 토끼의 모습으로 서서히 변해갔다.
벌레들은 서로의 몸을 더듬으며 천천히 흩어졌다.
방금 전까지 토끼의 형체를 흉내 내던 작은 것들은 이내 모양을 잃고 바닥을 기어 다니기 시작했다. 아이의 손끝에도 몇 마리가 달라붙어 있었다. 아이의 피부 위를 기어오르며, 마치 길을 찾는 것처럼 방향을 바꾸고 또 바꾸었다.
아이는 그것들을 떼어내지 않았다.
손등 위에서 꿈틀거리는 감각이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것처럼 느껴졌다. 분노가 사라진 자리에는 설명할 수 없는 공허가 남아 있었다. 그 공허는 따뜻하기도 하고 차갑기도 했다.
아이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이게...나인가?”
벌레 하나가 아이의 입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씹지도, 뱉지도 않았다.
그저 눈을 감고 있었다. 멀리서 다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말했다.
“또 하나의 작품이 탄생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