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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주일 때 알았다면 좋았을 것들_4

잘 팔아주는 광고주

by 김대영


"광고를 잘 팔아준 광고주였어요"



광고대행사에 들어오고 나서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문득, 궁금했다.

갑과 을의 위치가 변하고 나니, 나는 어떤 광고주로 기억에 남아있을지.

오랜 시간 같이 일했던 대행사 분께 물었다.

"저는 어떤 광고주였나요?"

"광고를 잘 팔아준 광고주였어요"


돌아온 답은 예상했던 범주를 벗어나 있었다.

이 답을 들었을 때가 어느덧 8년 전. 그땐 광고대행사 입사 초반이라 잘 몰랐다.

저 말이 담고 있는 의미를...


0000 광고제안_최최최최최최최종이면 좋겠다. ppt


이번 광고 제안서에는 '최'자가 몇 개 붙을까?

간혹 끝나지 않을 거 같은 광고제안이 있다.

물론, 광고주로 있을 때 나 역시 보고를 거듭하는 광고 프로젝트가 싫었다.

그 어떤 광고주도 그 과정을 즐기지 않을 것이다.


광고주로 광고업을 하게 되면 가장 중요한 일이 무얼까?

의사 결정자인 윗 분들께 광고 안을 보고하고 결정을 받는 일이다.

아주 큰 대기업이 아니면 대부분이 대표이사 선까지 보고된다.

적게는 수억에서 많게는 수십억이 들어가는 결정이니 쉽사리 끝날 일이 아니다.


그래서 문제가 있다.

보통의 기업은 광고 담당자와 대표 사이에 엄청나게 많은 의사 결정자들이 존재한다.

광고 담당자 위에 팀장, 팀장 위에 상무, 상무 위에 전무, 전무 위에 부사장, 부사장 위에 대표님.

이 과정을 최소화해도 2~3번의 보고 과정은 필수다.


이 과정을 잘 통과하기 위한 과정은 순탄하지 않다.

광고는 수학처럼 하나의 답이 정해져 있지 않다. 그래서 단계마다 의사 결정자의 답이 다르다.

때문에 의사 결정자가 생각하는 사업의 방향은 물론 크리에이티브의 기준, 유머의 코드나 모델, 음악의 취향, 하물며 의상과 같은 패션 취향까지 넘어야 할 때가 있다.


여기서 광고주로서의 담당자가 해야 하는 일이 중요해진다.

의사 결정자가 생각하는 방향을 잘 못 읽거나, 의사결정자의 취향을 모르면, 보고 때마다 새로운 방향이 만들어지고 수 없이 많은 안들을 만들어야 한다. 누가? 광고대행사가.


한 두 번은 담당자의 잘못을 대행사의 잘못으로 뒤집어 씌울 수 있다.

하지만 이 과정이 거듭되면 결국 최종적으로 욕을 먹는 건 광고주, 기업의 광고담당자다.


돌아보니 내가 광고주로 잘했던 게 하나 있었다.

나는 '광고를 잘 팔아주는 광고주'였던 거다.

윗분들의 마음을 잘 읽는 건 아니었다. 그랬다면 대기업에서 더 승승장구했겠지.

그럼 나는 어떻게 윗분들에게 광고를 잘 팔았을까?


광고대행사가 가져온 광고가 최선이라고 생각될 때, 나는 대행사와 혼연일체가 되어 광고 안을 팔았다.

내가 광고주로서 잘 한 건 그거였다.

거짓말 조금 보태 목숨 걸고 광고 안을 파는 것.


'이거 잘 안되면 회사를 나가겠다'

'이 번 만큼은 한 번만 나를 믿어 달라'

'상무님이 잘 몰라서 그런 거다. 이 자료를 봐라' 등등등

어쩔 땐 협박을, 어쩔 땐 두꺼운 근거 자료를 책상 위에 들이밀었다.


광고대행사에 와 보니 알게 되었다. '나 같은 사람이 많지는 않구나'

의사결정자에게 광고 안을 보고 할 때 많은 광고주들이 결정자의 눈치를 본다.

보고 몇 시간 전까지 '좋았던' 광고 시안은 '제 생각도 별로입니다'로 바뀐다.


의사결정자에게 자신의 생각을 잘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은 잘 안다.

상하의 위계가 뚜렷한 기업은 더 그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광고주가 해야 할 많은 일 중, 중요한 것 하나를 뽑자면 바로 이거다.

'광고대행사와 한 마음이 되어 최선을 다해 광고를 파는 것'


광고 보고에서 결정자의 부정적 피드백에 고개만 끄떡이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어려운 일은, 결국 인정받을 수 있는 일은, 의사 결정자의 마음을 읽고 가려운 곳을 긁어줄 방향으로 광고를 만들게 하는 일, 대행사가 가져온 시안이 최선이라 생각하다면 결정자를 설득해 본인이 원하는 방향의 캠페인을 실행하는 일이다.

동의되지 않는 결정자의 생각에 맞춰 캠페인을 진행하면, 결국 성과가 나지 않아도 책임은 나에게로 온다.


광고대행사에서 일해보니 알았다.

광고주의 필요 덕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광고를 잘 팔아주는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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