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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대행사 신입들의 괴로움

멈추지 않고 계속 가면 된다.

by 김대영

광고대행사에 입사하기 전 다니던 회사는 외국계 생명 보험사였다.

명색이 임원이다 보니 영어를 써야 할 일이 종종 생겼다.

그전까지 나의 영어 도전기는 시즌제의 드라마 같았다. 연속되지 않았고 늘 필요할 것만 같을 시간을 지나면 끊기는 일이 다반사였다.

보험사 전에 다니던 통신사에서, 승진에 토익 점수를 반영할 거라는 헛소문으로 인해 몇 개월, 회사의 인재 개발 프로젝트에 선발돼 그룹 연수원에 한국말 쓰지 않고 감금되었던 한 달간, 그 후로 이런저런 이유로 띄엄띄엄.


외국계회사는 시즌이 좀 길긴 했다.

예고도 없이 방문을 열고 들이닥친 외국인 임원을 몇 번 맞이하자 생존을 위해 닥치는 대로 공부를 했다. 아침마다 필리핀 선생님과 전화 영어를 했고, 운전하며 일빵빵 영어회화를 틀어놨고, 회사의 통역 직원과도 영어 수업을 진행했다. 유창함과는 거리가 상당하지만 영어로 어떻게든 의사소통을 해볼 수 있는 실력은 그 2년의 배움이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시즌은 시작하지 못했다. 그러니 정체기, 아니 영어 실력의 쇠퇴기를 지나고 있다.


영어를 배울 때, 많은 이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지점이 있다. 영어 실력은 시간에 정비례하게 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어 배움의 결과는 이런 그래프가 그려지지 않는다는 거다.

영어 실력은 보통 아래와 같은 그래프처럼 정체기와 급상승기를 경험하며 늘어난다


정체기라 생각하는 시간은 사실 실력이 늘지 않는 기간이 아니다.

모르는 사이 실력이 계속 쌓여가고 있는 시간이다.

하지만 실력이 늘지 않는 것 같아 공부를 포기하면 실력이 급상승할 다음 단계를 맛보지 못한다.

실력이 늘지 않는다고 실망할 시간에 더 공부에 정진해야 하는 이유다.


광고 대행사에 입사 한 1~2년 미만의 신입사원들은 회의 시간에 좋은 아이디어를 갖고 오지 못한다.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그들이 들어야 하는 말은 한 가지다.

‘괜찮다. 못해도 된다. 그게 정상이다’

항상 '이 놈이 광고 대행사에서 계속 일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지게 했던 신입들이

1년이 지나고 나면, 신기하리만큼 안타를 치는 횟수가 늘어난다.

단타냐 장타냐 혹은 홈런이냐의 차이는 있어도 실력이 늘어나는 건 같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길은 없으나 크리에이티브 실력도 영어 실력 향상의 그래프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2023년 29년 만에 한국시리즈 우승을 견인한 MVP 오지환 선수의 타율은 19타수 6안타로 타율 0.316이었다. 19번 타석에서 들어와 13번이나 안타를 치지 못한 거다.

야구 역사상 시즌을 모두 소화하고 4할을 넘은 선수는 손에 꼽는다. 4할도 10번 타석에 들어 6번을 아웃당한 거다.


경쟁 비딩을 준비하면서 매 회의마다 좋은 아이디어를 가져오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마찬가지지만 신입이나 낮은 연차의 후배들은 더 그렇다.


열 번에 일곱 번을 헛다리 짚어도 3번만 치면 훌륭한 타자라는 칭호가 붙는다.

광고대행사에서 아이디어를 내는 일도 마찬가지다. 1년을 정리하며 내 아이디어가 경쟁 비딩의 승리에 조금이나마 기여한 횟수가 2~3번만 되어도 잘한 거다.

신입은 그 횟수가 0이어도 된다.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해야 안타를 칠 수 있는지 감이 온다.

위에서 보여준 그래프처럼, 정체기라고 느껴지는 순간에도 실력은 계속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시간은 분명 힘들고 괴로운 시간이다.

회의 시간에 좋은 소리를 듣는 일이 없으니 어찌 괴롭지 않을까?

'내가 이 일을 계속해도 되는지', '이 일이 나와 맞지 않는 건 아닌지'

걱정도 되고 고민도 많을 거다. 하지만 그런 걱정과 고민이 있다는 것 만으로 된 거다.

괴로움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커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만있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그 모든 과정이 모두 나를 키워가는 거름이다.

그러니 자신을 믿고 멈추지 말고 계속 가면 된다.

가다 보면 어느 순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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