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SR 아이디어의 어려움
'사람들의 생각을 변화시키는 일'
'선한 영향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일'
'따뜻한 시선으로 어두운 곳을 밝히는 일'
많은 예비 광고인들이 동의하는 광고의 정의 아닐까?
나도 같다. 처음 광고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위의 정의들에 동의하며 그런 광고를 만들고 싶다.
하지만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기업은 위와 같은 이유로 광고를 제작하지 않는다.
간혹 광고제 수상을 원하는 기업이 있거나 같은 목적의 광고대행사가 비용을 투자하면서 캠페인이 성사되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CSR 류의 광고를 만드는 것은 브랜드 선호를 높여 궁극적으로 기업의 제품을 팔기 위해서다.
CSR은 수단일 뿐이며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은 없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광고의 선한 영향력으로 세상에 기여하고픈 광고인과 기업의 이익을 위해 광고를 만들어야 하는 광고주의 격돌. 물론 대부분의 광고인들은 싸울 생각조차 하지 않는, 현실적인 광고인으로 변화한다.
현실적인 광고인이 되는 것이 틀린가? 그렇지 않다.
광고는 광고주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일이며, 그 문제는 대부분 매출과 이익을 늘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실현하기 힘든 이상만을 품은 채 살아가야 하는가?
이 역시 틀리지 않다.
나 역시 광고의 선한 영향력을 믿으며 실낱 같은 끈을 언제나 놓고 있지 않다.
'선한 영향력'이 담긴 광고를 광고주에게 팔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광고가 조금이나마, '세상을 향해 따뜻한 메시지를 던질 수 있음'을 나의 프로젝트에서 구현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럴수록 더 영리하게 접근해야 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을 유지하면서 차갑게 현실적 고민을 해야 한다.
CSR 캠페인 아이디어가 기업이 추구하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음을 확실하게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또는 아이디어를 목적에 맞추어 영민하게 바꾸는 작업이 필요할 수 있다.
기업이 원하는 목표와 맞지 않은 아이디어는 그냥 머릿속에 잠자는 아이디어로 남을 뿐이다.
2019년 펜타클은 LG유플러스의 5G 런칭 캠페인을 진행했다.
통신사들은 너나없이 5G의 빠른 속도를 알리고자 했다.
우리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해보기로 했다.
통신의 속도가 빨라지면 과거와 달리 어떤 것을 할 수 있을까?
고용량의 데이터를 빠른 속도망에서 실시간으로 전송하게 되면 AR이나 VR처럼 가상의 현실을 구현하기 용이해진다.
가상현실은 말 그대로 실재하지 않는 것을 현실화하는 것이다.
우리는 프로젝트에 앞서 이런 질문을 던졌다.
'실재하지 않는 어떤 가상의 공간을 만들어 줄 때 5G는 더 큰 가치를 갖게 될까?'
보통의 질문은 이것이다. '어떻게 빠른 속도를 보여줄까?'
하지만 우리는 질문을 바꿨다. '5G로 할 수 있는 어떤 일이 5G의 가치를 제대로 보여줄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답으로 만들어진 것이 '멸종동물공원'이었다.
환경 문제로 인해 멸종되어 가는 동물들이 모인 가상의 동물원.
회의를 하면서 모두 알만한 만화캐릭터 대부분이 멸종되었거나 멸종위기 종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피카츄의 모델 아메리칸 피카, 주토피아의 갈색목 세발가락 나무늘보, 리오의 주인공 스픽스 마코 앵무새, 손오공 모델 황금들창코 원숭이 모두 인간의 욕심 때문에 살 곳을 잃고 개체수가 줄어가고 있었다.
이 프로젝트는 디지털 프로젝트로 시작했지만 TVC로 확장되었다.
고객들이 VR과 AR를 체험할 수 있는 멸종동물공원 팝업스토어를 만들었고 아이들이 쉽게 멸종동물공원을 체험할 수 있도록 팝업북을 제작하기도 했다.
멸종동물공원 VR컨텐츠는 서울시의 초등학생 친환경 교재로 활용되는 영예를 맛보기도 했다. 광고 하나가 초등학생들의 교재로 활용된 것은 유일무이한 일이었다.
광고제 수상은 덤. 2019년과 2020년 대한민국광고대상을 비롯해 뉴욕페스티벌등 한 캠페인으로 20개가 넘는 상을 받았다.
결과만 본다면 좋은 아이디어로 시작해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은 캠페인이다.
이 캠페인은 아이디어 단계부터 실행까지 1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그만큼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적지 않은 시간과 예산을 써야 했다. 이 중 가장 많이 공을 들인 것은 광고주를 설득하는 시간이었다.
이유는 앞서 말한 것과 같다. 어떤 기업도 마케팅 예산을 좋은 일에 쓰지 못한다.
멸종동물공원은 경쟁사와 차별적인 5G 마케팅 프로그램이면서 5G의 가치를 다른 차원에서 해석한 이유로 광고주의 동의를 받아냈을 뿐이다.
앞으로 남은 광고인의 삶에서 이 정도의 예산과 시간을 쓸 수 있는 CSR 캠페인을 또 할 수 있을까?
힘들 거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도전하지 않겠다는 건 아니다.
광고를 업으로 삼고 싶은 후배들을 만나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캠페인에 감명을 받아 광고가 하고 싶어 졌다고 적지 않게 이야기한다.
하지만 광고를 시작하면 이런 작업이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순수한 그 마음을 접는다.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만 그 마음을 버리지 않고 살아가돼, 더 영민하게 고민하고 광고주를 설득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설계하면좋겠다.
광고주로 시작해 대행사에 근무하는 지금까지, 내 마음 속에 숨겨진 욕망을 광고 안에 담을 수 있었던 케이스는 고작 몇 개 밖에 없다.
순수한 그 마음을 버리지 않으면 기회는 찾아온다. 기회가 올 때 그 기회를 살리기 위해서는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