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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주일 때 알았다면 좋았을 것들_2

우월적 지위.

by 김대영

‘은퇴를 하고 나서 알았다. 존중, 대우, 배려, 경청, 호의 등, 나에게 제공되던 모든 것들은 명함 속 내 이름이 아니라 이름 앞에 있는 직책, 직급에게 제공된 것이었다. ‘


어느 책에서 읽은 구절이다. 은퇴는 하지 않았으나 비슷한 경험이 내게도 있다.


광고주로 근무할 때 연간 수백억의 예산을 집행했다. 금액이 적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대행사에 와보니 진짜 큰 광고주이긴 했다.

그 덕에 잘 나가는 광고대행사들과 한 번씩 일했다. 모두 나의 의견을 경청했고 수용했다. 광고주에서 대행사로 이직하자, 먼저 연락을 주는 대행사 사람들은 한 명도 없었다. 나쁜 광고주까지는 아니지 않았을까?라는 착각에, 서운함도 있었지만 광고대행사에서 일해보니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이 보내준 호의는 모두 내 앞에 붙어 있는 광고주라는 우월적 지위 때문이었다.

광고주로 일할 때, 나의 위치를 우월적이라고까지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고백하건대 나는 광고주로서, 돈을 쓰는 사람이고 대행사 사람들은 그 돈으로 먹고사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생각이 매우 위험한 생각임을 대행사에 와서야 깨달았다.


광고주는 광고의 주인이지 광고대행사의 주인은 아니다. 광고주와 광고대행사의 관계는 엄밀히 말하면 물건을 사고파는 관계일 뿐이다. 대행사는 광고 아이디어를 주고 광고 집행 금액의 일부를 대행 수수료로 받는다. 광고주가 쓰는 대부분의 돈은 자신들의 상품을 광고하는 데 쓰는 돈이다.


대행사는 광고주가 생각지 못한 광고의 전략과 창의적 아이디어를 팔고 대가를 받는다. 물건을 팔아 수익을 내야 하는 입장에서, 돈을 쓰는 고객에게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둘의 관계가 주와 종의 관계는 아니다.

나는 은연중에 광고주와 광고대행사의 관계를, 돈을 주고 일을 시키는 고용, 피고용의 관계로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도 많은 광고주들이 그렇게 일을 시킨다. 내 돈으로 먹고 사니 내 말을 들어야 한다는 생각. 돈을 주니 시키는 일은 뭐든 해야 된다는 생각.

광고주가 이런 생각을 갖게 되면 광고대행사의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진다.


하지만 정작 광고주일 때 몰랐고 대행사에서 일하며 알게 된 또 다른 중요한 것이 있다.


‘그래 시키는 대로 해주자. 우리가 이 광고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결국 광고주가 자신의 위치를 우월적으로 여기며 광고대행사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자신의 주장만을 펼치면 제대로 된 대행사의 가치를 얻어내지 못한다.


변호사와 변호사를 고용한 의뢰인도 계약 관계에 의하면 갑과 을이다. 돈을 주고받는 관계만 따지면 의사와 환자도 마찬가지다.

‘제가 인터넷에서 봤는데 이런 판례에서…’

‘제가 의학 논문을 봤더니..’

‘내 돈으로 먹고사는 주제에…’


변호 의뢰인과 환자가 이런 말을 하면 변호사와 의사는 어떤 생각을 할까? 어떻게 의뢰인을 대할까?


‘당신이 전문가면 나한테 왜 왔나요?’

쉬운 이해를 위해 전문직을 예로 들었지만 가전을 고치기 위해 방문한 AS기사도 마찬 가지다.


광고주는 광고제작에 돈을 내는 광고의 주인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광고주의 생각이 모두 정답이 될 수 있는 없다.

변호사, 의사, AS기사 모두 문제를 해결해 주는 전문가들이다. 광고대행사도 그렇다.

광고대행사의 가치를 잘 뽑아 먹을 수 있는 것은, 광고대행사를 믿어주고 맡기는 일이다.

광고주가 하지 못하는 것을 할 수 있게 해주는 방법은 그들의 말을 더 듣고 존중해 주는 것이다.


광고주가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주장하면 대행사는 절대 능동적으로 아이디어를 내지 않으며 어느 순간 수동형으로 변한다.

‘네가 전문가니까 네가 하면 되겠네’

‘더 고민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만 하자’


그런 면에서 나는 빵점짜리 광고주였다. 늘 내가 옳다고 생각을 했다. 내가 돈을 주니 대행사는 내 말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광고 대행사는 15% 정도의 수수료를 받는다. 같은 수수료를 지급하면서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야 하는 것. 그것은 광고주가 해야 할 의무다.


회사에 중요한 룰 중 하나는 시키지 않은 일을 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광고주에게 동일한 태도로 가치를 제공할 수 없다.


광고대행사가 시킨 일만 잘하게 만들 것인지, 광고주가 생각지 못한 기대 이상의 가치를 주게 만들 것인지는 광고주의 몫이다.


후배들이 광고주가 되어 광고를 한다면 나의 경험이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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