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결국 나도 최고급, 몇 평, 재산 이런 거에 흔들리는 흔한 여자였어, 그러니까 이제 멈춰 줘, 반반한 얼굴에 이끌려 적당히 어린애랑 즐거웠다, 놀이동산 다녀온 기분이었다 기억할게, 너도 나이 많은 여자랑 경험 한 번 쌓았다 생각하면 되잖니?"
"하, 누나! 빌어먹을!
남자는 숨을 한 번 고르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다시 뜨고 여자를 더 선명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힘들었잖아요, 그 자식 곁에선 춥다고 외롭게 만드는 남자라고 그랬잖아! 내 얼굴이든 뭐든 아무거나 괜찮으니 한 가지라도 붙들고 내 옆에 있어줘요, 응? 제발."
"넌! 왜, 흑흑, 적당히 좋다가 끝내라는 내 말을 왜 안 들어, 사랑까지 가면 비참해지니까, 나 지금 너 사랑하게 될 것 같으니까, 그러니까 사랑이 시작되기 전에 그만 멈춰달라는 걸 왜..."
다음 단어는 허락되지 않았다. 어린아이가 자신이 쥐고 있던 커다란 막대사탕이 누군가에게 빼앗길 새라 집어삼키듯, 어린 남자는 다급하게 그녀의 입술을 입 안으로 가두어들였다. 남자를 어르고 달래어 떼내야겠다고, 가벼운 주먹으로 남자의 어깨를 두드리며 저항하던 여자의 손이 어느새 그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컷!"
촬영감독님의 사인에 신을 이어가던 감정을 추스르며 배우들이 모니터와 작가 앞으로 모여든다. 감독님 눈치를 설핏 살폈다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고 메이크업 수정을 받는 남자주연에게 기어코 첨언을 하고 만다.
"차 배우님, 정말 완벽한데요, 원작의 느낌을 살리자면 분노 반 애절 반이 아니라 분노 26프로 애절 74프로거든요, 비율 웃기죠? 근데 또 비굴하진 않아야 해, 이 미묘한 차이 어떻게 조금만 더 살려주실 수 없을까요?"
원작 소설, 3만 명의 여성독자들이 실신하게 만들었던 감정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지금보다는 확실한 밀당의 앵글이 잡혀야만 한다. 그 장면을 어떻게든 최고조로 끌어올리기 위해 감독님은 열일곱 번째 액션을 외친다. 작가가 감독보다 더 유난을 떠네 어쩌네 구시렁구시렁거리면서 본인도 아쉬운지 내게 특별한 항의는 없다. 매서운 바람에 우리 잘생긴 배우님 귀가 얼어 빨개졌네, 이 정도면 그리 나쁘진 않은데 통과시키자고 할까? 살짝 아쉬움은 남지만... 그렇지만 뭐 어때, 얼굴이 서사이고 장르다. 누가 감히 비난할쏘냐. 주연이 차은우에 서브남이 현빈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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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백 년 가까운 개인의 역사에서 제일 큰 역변은, 돌 무렵의 직립보행 다음으로 최근 5년이라 해도 허언이 아니다. 브런치에 글을 계속 써 나가다가 부캐를 하나 더 만들고 싶어 졌었다. 우아하고 고상하기만 한 건 재미없지, 40대 후반의 세대주랑 연애하기는 글렀지만 글 안에선 못할 것도 없잖아? 5년 전, 허무맹랑한 꿈과 함께 시작된 글 하나에 현빈과, 글 하나에 박보검과, 글 하나에 차은우, 차은우, 차은우... 그렇게 한 편 한 편 써가며 애 셋 딸린 유부녀의 상상력은 속절없이 로맨스를 향하여 위험한 욕망의 쌍두마차를 타고 질주했다. 마차는 유명 플랫폼의 웹소설 로맨스 부문 1위, 오디오 클립과 웹툰 제작이라는 역을 정차했다가 드라마 제작이라는 종착역에 벌써 두 번째 나를 데려다주는 중이다.
"작가님, 2주 뒤에 해외 촬영은 런던에서 진행할 텐데 진짜 오시려고요? 시차적응 힘드실 텐데."
작가가 지키고 서 있는 게 은근히 귀찮은 감독님이 만류의 뜻을 완곡한 포장으로 숨긴 채 나를 떠본다.
"괜찮아요, 이번만 보고 이제 감독님에게 다 맡길게요, 나 감독님 완전 믿잖아요."
두 번째 작업을 같이 하며 서로 욕하면서 정도 든 감독님, 런던에 가면 맛있는 베이글 사드려야지.
"그런데 작가님은 애가 셋이잖아, 혼자 그렇게 훅 떠나도 되는 거예요? 남편은 어떡하고?"
"아우, 다 알아서 하겠지요, 유명 작가 남편이랑 자식으로 사는 게 어디 쉬운가?"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내심 걱정이 되고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82년생 김지영 시절이 아직 몸에 밴 탓인가 보다. 오벳 작가님 아들의 미술전시회 겸 슬초브런치 5회 동창회가 런던에서 열리는 김에 주저 없이 티켓을 끊었다. 하지만 회사일로 바빠진 남편과 한창 먹고 크는 학령기 남매들을 생각하니 저절로 앞치마를 두르고 싱크대 앞에 선 나로 되돌아가는 기분이다. 여전히 부엌에 남아 있는 내 지분에 대한 씁쓸함, 5년간 이룬 쾌거, 걱정과 설렘이라는 감정의 혼재를 손가락에 실어 슬초 다이어리 속에 낙엽책갈피처럼 곱게 꽂힌 영국행 퍼스트 클래스 티켓을 가만히 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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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승진할 곳이 없어서 임원이 된 남편은 시한부 계약직의 노예로 산다며 툴툴거리는데 최태원 회장에게 수시로 불려 나가 필드로 다니는 걸 보면 아직 노예계약 끝나기엔 한참인 것 같다. 한약 지어놓은 거 거르지 말고 알아서 잘 챙겨 먹어야 할 텐데.
아들 두 놈들, 몇 년 사이 내 덩치를 훌쩍 넘어서고 쌓아놓은 식량을 먹어치우는 게 무섭다. 말하는 법을 잊은 걸까 싶을 정도로 대화는 없는데 먹을 땐 입을 벌리는 걸 보면 쟤들은 아귀인가 싶다. 주방이모님이 코스트코엘 일주일 동안 몇 번을 다녀오시는 건지, 골드스타 회원비가 나만큼 아깝지 않은 사람이 또 있을까. 매일같이 운동장에서 축구며 농구를 두 시간씩 뛰다 바지는 죄다 구멍내서 오니, 바지값 벌어오려면 열심히 글을 더 써야 한다.
가족들에 대한 염려되는 마음을 한 줌 덜어주는 건 드디어 질풍노도를 막 끝내고 정신을 차린 큰 딸이다. 그토록 바라던 한국 애니메이션 고등학교 합격소식이 발표된 날은 내 첫 번째 웹소설이 분당의 초록 건물에서 계약 성사된 날보다 더욱 기쁘고 감격스러워 딸을 부둥켜안고 엉엉 울어버렸다. 그동안 싸우고 지랄하고 때론 유치하게 대립하던 너와 나의 시간들이 한 번에 보상받았다. 무엇보다 훌륭한 것은 애니고는 기숙사 제도라 가끔 볼 수 있다는 것. 세상에나 고마워라, 애니고 만세! 적당히 멀어진 우리는 더욱 애틋해질 것이었다.
캐톡!
'오늘 최 회장이랑 신입 오리엔테이션 축사에 가야 해, 행사 끝나려면 늦을 거야.'
와이프가 취미던 남편과도 적당히 멀어지게 해 준 최 회장님이 새삼 고맙다. 삼 남매 키운다고 힘든데 푼돈 벌어온다고 괜히 고생하지 말고 놀러 다니기나 하라던 남편, 그래 조금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어, 내가 이번에 런던으로 제대로 놀러 갔다 올 테니 집 잘 보고 있어 줘.
아우디 가죽시트 깊숙이 몸을 기대어 넣고 기사님께 임윤찬의 리스트 연주곡을 부탁했다. 한남동 집으로 도착하기까지 40분, 눈을 감은 채 하루를 복기하며 초절기교의 선율을 감상한다. 이만하면 최고의 성덕이지, 차은우도 현빈도 포기 못한 유부녀에게는 감지덕지한 욕망의 실현이다. 현숙한 방법으로 욕망을 이룬 유부녀가 될 수 있도록 자기 관리의 든든한 메이트가 되어준 슬초 다이어리를 다시 펼치고 이 달의 스케줄을 재차 확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