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간 딸 집에 올라와 김장해 주시고 살림도 도와주시던 친정엄마가 너희 집에 도저히 못 있겠다고 짐을 싸시는 걸 말리다결국울증이 한 움큼 올라왔다. 캐리어를 거칠게 꺼내와 속옷과 여벌옷, 화장품을 던져 넣었다. 겨울만 적당히 지내고 봄옷은 몰래 올라와 다시 싸서 내려가면 되지. 5인 가족 여행 갈 땐 이민용 캐리어가 터질 듯하더니 나 한 몸 이 집에서 빼고자 하니까 기내용 캐리어 하나로 단출하다. 악에 받쳐 부르르 떨고 눈물을 글썽이면서도 그 와중에 노트북과 에어랩은 또 잊지 않고 챙겨 넣었다. 글쓰기와 내 헤어스타일은 소중하니까.
발단은 사춘기 딸과 아직 멋모르는 꼬맹이 아들의 투닥거림이었다. 남동생의 장난이 예민한 여자애에겐 받아들일 수 없는 역린이었고 분노조절이 안된 누나는 동생을 향해 거친 언사를 내뱉고 말았다.
"내가 반드시 아빠 죽이고 나면 너도 죽일 거야."
바로 곁에서 듣고 있던 아빠의 의문의 1패. 아빠는 의문이겠지만 엄마는 이유를 알고 있다. 예민한 딸의 심리, 여자의 심리를 이해할 줄 모르는 갱상도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자란 극 극 ESTJ남자. 히틀러는 사실 따로 있었다.
사실 딸아이와 아빠는 서로 사랑한다. 아빠는 인터넷을 서칭 하다가 딸애가 좋아할 만한 걸 보면 조용히 날 불러 어떠하냐 물어보고 주문했다. 딸애가 가고 싶다는 고등학교의 모집요강을 조사해서 내 카톡으로 계속 전송해 주었다. 딸이 태어났을 때 병원에서 집으로 처음 오던 날, 여름햇빛 한 줄기도 눈부실까 봐 아기를 안고 걷는 친정어머니 곁에 딱 붙어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밀착케어했다. 친정엄마는 그때 일을 아직도 한 번씩 꺼내 말씀하시는데, 무슨 VIP 의전하는 경호원인 줄 알았다 그러신다. 자기 가족에 대한 애착과 책임감은 세상에서 제일 강한 남자다. 표현을 할 줄 몰라서 그렇지.
딸아이도 아빠에게 너무 다가가고 싶다. 남편이 늦는 날에 저녁시간이 되었는데 '아빠 언제 와?'라고 묻는 아이는 딸아이밖에 없다. 아들 두 놈은 아빠가 늦게 오시거나 말거나. 나중에 자기들이랑 10분 공 던지고 받거나 체스랑 장기를 잠시 둬주면 땡이다. 딸애의 기도제목도 온통 아빠를 위한 거였다. '아빠 안 잘리게 해 주세요', '아빠 탈모 안 되게 해 주세요'. 좀처럼 곁을 보드랍게 내주지 않는 아빠에게 관심받고 싶고 친한 척하고 싶어 하는 행동이란 퇴근 후 잠시 쉬는 아빠에게 치근거리기, 시비걸기, 침대 아빠 자리에서 뻗대고 있기. 외동딸이 할 수 있는 최대의 관심 표현이다. 마냥 해맑을 수 없는 사춘기라서 그렇지.
두 사람의 평행선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눈치를 살피며 다리를 놓아보겠노라 토목공사에 부단히 애를 썼지만 예민하고 주장이 강한 기질을 똑같이 가진 서로를 끌어안기는 어려웠을 거다. 그러려면 먼저 본인의 기질을 인정하고 자신을 먼저 안아주는 작업을 했어야 할 테니.
그렇게 묵혀진 이유에서 시작된 불씨는 딸아이가, 점화는 남편에게서, 불똥은 나에게 튀고 말았다. 어찌 됐든 자식의 잘못된 언행을 가르쳐야 하니 친정어머니와 같이 딸애를 잡았다. 도리를 조곤조곤 설명하기도 했고 잘못된 행동을 짚어주며 소리가 고조되기도 했다. 눈물도 나왔고 설득도 하다가 맘속으론 반성의 기미가 약간 있으면서도 자존심 굽히려 들지 않는 드센 눈빛에 이러고 있는 시간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토목공사 때려치우자.
두 사람 사이의 오작교가 되는 것도 이젠 못해먹겠어, 성미 급하고 절대 한 마디도 져주지 않는 네 아빠나, 그 성질 고대로 닮아 매일 엄마를 이겨먹으려는 너나, 내가 상대하기엔 너무 강한 종족이야.
엉엉 울며 짐을 쌌다. 캐리어 하나 채우는 데에 5분도 걸리지 않았다. 남편은 남자애 둘을 데리고 이미 밖에 나간 상태였고, 소심히 뒤따라와 붙잡는 딸애를 뒤로하고 친정엄마랑 택시를 불러 탔다.
"아저씨, 수서역이요."
남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 부산 가'
전화가 왔다, 뭐 하는 거냐고.
"더 이상은 못해먹겠어, 알아서 잘해봐."
택시아저씨, 거눈치도 없이 빠르군. 주말인데 수서역까지 한 번 막히는 구간도 없이 곧장 오다니. 가열차게 캐리어를 끌고 뛰쳐나오긴 했지만 오만가지 생각이 겹치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엄마랑 같이 진짜 부산엘 갈까? 잠시 갔다가 내일 새벽기차로 올라와? 부산 가는 척하고 잠시 나와있다가 집으로 가야 하나?'
아직 결정도 못 내려놓고 창구에서 부산행을 외쳤다
"전 좌석 매진입니다."
에라이, 입석도 다 나갔다.
엄마 몰래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살짝내쉬었다. 그나저나 어떡하지, 엄마는 가신다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엄마도 그냥 더 있다 가라는 뜻 아닐까?
"엄마, 그냥 내일 표 끊어 줄 테니까 집으로 가자."
"됐다, 내는 신경 쓰지 마라, 그냥 고속버스 타고 갈란다."
서울 부산 왕복만 n0번째인 우리 엄마, 씩씩하게 3호선을 타고 터미널로 향하셨다. 캐리어를 끌고 가시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며 또 눈물이 터졌다. '미안해, 미안해 엄마, 내가 불효녀라 진짜 미안해요.'
작은 캐리어를 다시 잡고 역 밖으로 나오는 길이 참 길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면서 인파를 헤치듯 걷고 있는 사연 있는 여자는, 이제 갈 곳이 없어졌다. 부산 친정집도 반쪽 명의의 집도 쉴 곳이 되어주지 못했다. 수서역 1번 출입구 앞에서 한참을 서서 지나가는 행인들과 차들을 바라보았다. 택시를 타고 집 근처까지 일단 갈까? 아니다, 캐리어 들고 나온 게 누가 봐도 집 나온 여잔데 동네에서 말이 돌면 큰 일이다. 무엇보다 카드내역서가 남편 핸드폰으로 날아가면 이 여자가 결국 근처 어디구나 하고 비웃을게 뻔하다. 선녀가 아이 하나를 더 낳았으면 내 심정을 알았을 텐데.
그러다 유효기간이 다 되어가는 생일쿠폰이 생각났다.주요 역엔 반드시 있는 스타벅스를 가자, 따뜻한 라떼를 그란데 사이즈로 시키고 달달한 케이크도 하나 '왕' 하고 떠먹자. 생각이 돌고 돌아 결국 '단 것'으로 자리 잡는 몸뚱이를 따라, 부산행이었던 캐리어는 수서역 스타벅스에 안착했다.
수서역 대합실보다 빈자리 찾기 어려운 이곳에서 구석진 자리를 찾아 크림라떼와 딱 봐도 '나 달아요'싶은 조각케이크를 주문했다. 엄마는 터미널까지 잘 도착했을까, 내려가시면서 얼마나 우실까. 딸애는 혼자 방에서 울며 자책하고 있을까, 남편은 날 걱정하기는 할까. 결국 들어가긴 해야 하는데 적당한 타이밍도 모르겠다.저녁 전에 들어가면 밥 차리러 기어들어간 줄 알 테고 저녁때를 넘겨 들어가면 감정의 골이 깊어질 것 같고.불효녀를 둔 불효녀의 케이크가 달지 않다.
맛을 느낄 수 없는 커피와 케이크를 사이에 두고 자리를 마주한 캐리어에의미 없는 초점을 둔 채
한참을 응시했다. 식은 커피로 더 이상 속을 데울 수 없는 한기가 들이치자, 흐리멍덩했던 시야에 정육면체의 윤곽이 점점 또렷해진다.
글을 쓰자. 어디 한 번 다 토해내 보자. 다 쓰고 나면 집으로 가는 거야. 퇴고는 완벽히 못하겠지만 생생함은 전해질 거야. 어디 하나 논리적인 구석은 전혀 없는데 집으로 돌아갈 구실을 억지로 찾은 셈이다. 그리고 이렇게라도 글을 남길 수 있어 다행이잖아. 글쓰기는 또 마음을 진정시켜 줄 테니까.
글 쓰니가 되어서 다행이다.
그리하여 오갈 데 없는 캐리어를 제 자리로 돌리는 능력이 있는 이 글을 시작하게 되었고 지금 막 마지막 문장을 쓰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