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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니애 Dec 23. 2023

TJ 남자의 분석적 사랑법

 TJ여자가 TJ남자를 만나 산다.

 정확히 다시 말하면, ESTJ가 하필 ESTJ와 백년가약 동맹을 맺어 아슬아슬한 눈치게임 중이다. 서로 "내가 대장이네, 네가 따라오시게." 하며 고지 선점 쟁탈전이 13년째 이어지고 있다.




 우린 너무나 현실주의이고 분석적이다. 금전 관리에 있어서는 모든 카드가 목적이 따로 있으니 그에 맞는 계획대로 써야 하고 운전을 할 땐 신호연동이 규정된 주행속도에 딱 맞게 이어져야 한다. 명절에 시댁 어른들께 드리는 선물을 4형제가 돌아가면서 맡고 있는데, 앞으로 5년 치의 순서를 단톡방에 공지로 걸어두었다. 차에 기름이 간당간당해도 아무 주유소나 지나가며 들어가지 않는다. 주행 가능거리와 다음 외출 행선지와 경유 최저가의 3박자 데이터가 맞아떨어지는 곳에서 주유하는 것이 원칙이다. 장난감 가게에서 아이들이 아무리 졸라도 '아싸, 기분이다' 하며 덜컥 지갑을 여는 일도 좀처럼 없다. 당연히 집으로 돌아와서도 계속 생각나고 꼭 필요하다 싶으면 인터넷 최저가격으로 사야지.


 이런 남녀가 같이 살다 보니 원치 않는 거울효과 치료를 빈번하게 받게 되는데, 어우 저렇게까지 하진 말아야겠다 싶은 부분들이 있어서 사회생활에선 나는 아닌 척 위장술도 펼쳐보았다. 아무렴 여초집단에서 살아온 깜냥이 있는데 이 정도면 감쪽같이 감정형처럼 보이지 않을까? 여러 무리에서 부단히 노력했지만 그저 F가 되고 싶은 T의 발악일 뿐, 금세 들키고 마는 딱한 ESTJ다.


 그래, 사람 쉽게 변하지 않지. 본인이 그러한데 남편이라고 오죽할까. 더군다나 아버지 중앙집권체제의 가정에서 4형제 중 3남으로 태어나 남중, 남고, 공대, 공과대학원을 거친 부산 사나이 성골 TJ가 아닌가. 그런 사내에게서 "사랑해."라는 애정의 속삭임을 듣는다는 것은 마치 북한이 종전을 선포하고 민주화 통일에 먼저 손을 내밀어 올 확률과 별반 다르지 않다. 뻔히 그런 줄 알면서도 이 아내는 그대의 다정한 말 한마디와 두근대는 설렘이 그리운 흔한 유부녀인지라 맘카페에 유행 중인 시시콜콜한 애정테스트 시험대에 빈번히 남편을 올려다 세워 놓았다.


 때는 2015년 9월, 한창 무지개 테스트가 유행 중이었다.

 "남편, 날 보면 무지개 일곱 색깔 중 무슨 색이 떠올라?"

 불과 얼마 전 '기싱꿍꼬또' 테스트에 처참히 실패했던지라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메시지를 발송했다. 함께 자리에 있던 어린이집 엄마들과 경쟁하듯 테스트는 시작되었다. '요 땡!'  놀이터 벤치를 둘러싸고 은근한 승부욕의 긴장감이 돌았다. TJ남자에게 조준 사격을 하면 실망할 게 뻔하니 나는 그냥 산탄 발사하는 심정으로 보냈던 것 같다.


 도... 도전!


 '아 제발! 네가 오늘 저녁에 고기를 먹고 싶다면 빨강이라고만 하지 마라!'



 "깨톡."

 답이 왔다.

 '하얀색'이란다.

 

 허허 젠장, 또 이렇게 동문서답이네. 역시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는 남자로군. 이번 테스트도 능구렁이같이 빠져나가는구나 싶어 헛웃음의 혀를 차며 백기를 들려는데 다음 메시지가 도착했다.




 난리 났다. 놀이터에 함성이 터졌다. 어린이집 엄마들에게 카톡을 보여주면서도 내 눈을 의심했다. 이 남자 누구인가요? 제 남편이 맞나요? 오그라든 제 손 발 좀 펴주실 분 어디 안 계신가요?


 정말 TJ다운 답변이 아닐 수 있을까? 무지개 발생의 과학적 원리까지 분석해 가며 본인으로서는 할 수 있는 최선의 답변을 해 준 셈이었다. 보기 중 답안을 제출하진 못하였지만 출제자의 의도를 넘어서는 우문현답으로 당당한 승리를 거머쥐게 해 준 남편을 위해 그날 저녁은 머리를 조아렸다. 밥상 메뉴는 육 첩 반상 특고기 식으로 대접해 드림이 당연했다. 저런 멘트를 날리고도 퇴근할 땐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 무심한 얼굴로 돌아온 그에게 '사랑해'를 내 귀에 캔디로 읊어보라 종용했지만 질색팔색 소름 돋아 도망가는 TJ남자여.


 지난날이지만 이런 옛 사진과 기록들을 발굴해 내면 머리싸움하고 있는 못난 아내 됨이 때로 미안해진다. 살면서 늘 대장질만 한 건 아니었는데. 본인의 완벽주의의 벽이 좀 높고 표현이 서툴러서 그렇지 어디 가서 다른 여자 깻잎 떼주는 것도 의지적으로 거부하는 남자인데. TJ의 굴레를 씌워서 편협한 시각으로 남편을 분석하려 했던 TJ여자라 하얀색 무지개의 가치대로 답하여 살아주지 못한 것 같다.

 

 낮에 송년회 모임이 있어 나간 장소에서 작년 겨울에 남편과 싸우고 나왔던 음식점을 지나쳤다. 그냥 남편이 무심코 했던 한 마디에 "응, 그러네."라고 했으면 식사도 즐겁게 마치고 커피도 한 잔 손에 들고 룰루랄라 집으로 돌아왔을 것을. 굳이 현상 분석을 해서 반증을 논하려다 일어난 기싸움이었다. 파스타는 두 입 먹다 포크를 내려놨고 곧이어 나온 피자는 바로 포장 직행. 눈물을 뚝뚝 흘리며 주차장으로 가던 동선이 보였다. 왜 그랬을까? 사회생활에선 F인 척 애를 쓰면서 남편한테는 왜 T를 부렸나.


 글을 쓰면서 남편에게 들켜서는 절대 안 되는 반성을 홀로 조용히 하고 있다. 우리의 고지쟁탈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기에. 백년가약을 맺었으니 앞으로 87년이 남았다. 그렇지만 TJ남자의 사랑법에 TJ여자의 방식으로 화답하자면 연말 연휴에 고기와 고기에 고기로 밥상을 차려 볼 작정이다. 마지막 메뉴는 제육볶음인 치명적이고 치밀한 계획.


 어때, 여보? 썩 탐탁지는 않아도 이 정도면 작년의 싸움은 화해가 되겠지? 미안해, 나는 불완전한 하얀색 무지개라 그런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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