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쓰니애 Dec 20. 2023

송년회, 분식집에서 하면 이상한가요?

 2023년 12월, 당신은 올해 몇 개의 송년회가 잡혀 있나요?


 언제부터인가 새해의 바뀐 숫자가 비로소 익숙해지면 벌써 연말인 그런 한 해를 반복하여 살고 있다. 아직 꼬맹이인 아들놈들과는 달리, 엘리베이터에서 "너는 몇 살이야?" 물어봐주는 어른이 없어서 내 나이도 몇 번 언급해 본 적 없이 새 나이를 맞이한다. 나이 물어봐주는 이는 이제 없지만 일 년 동안 기꺼이 시간을 함께 보내준 고마운 벗들이 있어 한 살 더 먹음이 속절없지 않다.


可與言而不與之言, 失人

가여언이불여지언 이면 실인 이요. <논어>


 더불어 지혜를 논할 만한 자를 만나고도 말을 하지 않으면 친구를 얻을 기회를 잃는 것과 같다 하였다.

노력 없이 인연은 만들어지지 않기에, 매년 12월이 오면 저마다 1년의 감사한 마음과 기쁨을 담아 송년회 모임 약속을 속속 잡는다. 그동안 우리 수고했지, 올해도 고마웠어, 내년에도 나라는 사람을 잘 부탁해, 네가 있어주어 나는 참 괜찮은 사람으로 한 해를 보냈어. 약속의 날짜를 잡고 오랜만에 만날 생각을 하며 분명 들떠 즐거워했는데. 왜일까? 모임 날짜가 점점 가까워 올수록 어딘가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하다.


 불편한 기운은 지갑사정에서 뿜고 있음을 알아채기 어렵지 않다. 부모로부터 독립을 하고 살림살이라는 걸 하기 시작한 이래로 16년 만에 체감하는 최대물가 상승의 요즘이다. 서민의 과일이었던 사과도 만원에 살 수 있는 개수가 5알, 칼국수도 8000원이 최저, 붕어빵도 큰맘 먹고 지폐뭉치를 꺼내야 하는 지경이니 먹는 문제를 떠나서 아이들 사교육비며 입히는 비용까지 끌고 오면 무얼 더 말하리. 당장 다음 달부터 학년이 바뀌니 금액도 올라가요 하는 학원비 앞에 한숨이 나온다. 먹는 걸 줄이든지, 입는 걸 줄이든지 뭐라도 보탬을 하고 싶지만 현실 앞엔 송년회로 나갈 지출이 다음 줄을 기다리고 있다.


 송년회가 없다고 해서 사람을 만나고 다니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뭐 집에서만 밥 먹고 다닌 것도 아니고 감성 카페의 크림을 잔뜩 끼얹은 커피와 한 입을 뜨면 행복이 찾아올 것 같은 디저트를 즐기지 않은 것도 아니다. 다수의 송년회 일정이 부담스러워진 데에는 '그래도 송년회인데'라는 말속에 들어있다. '청담동 고급 오마카세 식당이나 호텔 뷔페는 못 가더라도 한 번은 그럴싸하고 좋은 곳에서 마무리해야지'라는 뜻이 담겨 있는 '그래도'. 그래도 송년회라서 룸도 잡아야 하고 그래도 1년을 마무리하며 마니또도 하면 좋겠고 그래도 명색을 따지니 근사하게 한 상 차려주는 곳이어야 한다.


 그래도의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외벌이 가정, 다둥이를 키우는 경기도 아파트 30평대 기준의 평범한 서민의 입장에서 식당을 찾아보겠다. 잠실 롯데몰이나 하남 스타필드 정도에서 모인다고 가정하자. 푸드코트가 아닌 대형 테이블에 앉을 수 있는 단독 식당을 위주로 1인분 가격을 조사해 보았다.


하남 스타필드

인도식당 : 런치메뉴 19,800 / 저녁모임 시 단품 위주 주문 35,000~

중식당 : 코스메뉴 최저가 39,000 / 식사와 요리(3인 1개 주문 시) 25000~

미역국 한식정찬 : 20,000~

한우 정찬 : 59,000

아웃백 런치 : 26,900~


잠실 롯데몰

이탈리안 식당 : 파스타 25,000~

인도식당 : 런치 38,000~

스페인식당 : 18,000~35,000

미국식 중식당 : 세트메뉴 1인 평균 33,000~

일식당 : 정식 37,000~


 얼핏 보아도 3만 원 이상은 넉넉히 예상을 해야 그래도 송년회 다운 모임이었다고 아름답게 기억될 터. 여기에 10,000~30,000 상당의 마니또 선물이 들어간다거나 우리 밥 먹었으니 차 한잔 하러 갈까? 하면 송년회 한 번에 50,000원은 기본으로 뿌릴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스타필드는 주차라도 무료지, 롯데몰은 주차비도 따로 나온다). 올해가 가기 전에 우리 얼굴 한 번 꼭 보자 했을 뿐인데 만남의 대가로 지출해야 하는 비용이 너무 크게 느껴진다. 송년회 2번에 둘째 축구교실 원비, 3번에 큰애 미술 학원비, 개별 만남까지 더하면 제일 무서운 영어학원비.






 의아하다. 가정경제 다 어렵다고들 하지 않았나? 사실은 그만저만 다 살만한데 나만 빠듯하게 쫓겨가듯 사는 걸까? 자신과 제일 가까운 5명이 본인의 평균이라 하던데 착각이었던 걸까? 반 평균 까먹는 만년 꼴등 학생이 되어 오도카니 홀로 섬에 부유하는 것만 같은 쓸쓸한 느낌이다. 잦은 송년회 모임에 마냥 해맑게 나갈 수 없는 어른이 되어버린 건 나만이 아닐 거라고 믿고 싶은 우격다짐을 하며, 이 참에 송년회의 의의를 다시 고찰해 보면 어떻겠냐 청하고 싶다.


 젊꼰대가 주장하자면, 송년회는 옳다. 연말 지출이 오버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유지되어야 하는 선한 문화이고 미덕의 자리이다. 지난 한 해를 뒤돌아보며 인연의 날실에 씨실을 엮어준 이들과 서로 감사하고 그간의 노고를 치하한다. 결속을 다지고 새해를 부탁하며 더 좋은 만남을 이어가기를 기원한다. 막역지우 한 사람만 있어도 성공한 인생이라 하는데 송년회로 여럿이 모일 수 있다면 어찌 빛나는 인생이 아니겠는가. 송년회는 그래도 이어져야 하겠지만 '그래도'가 수식하는 것이 우리의 만남이고 어렵게라도 내어보는 시간이 되는 것으로 족했으면 한다. 앞으로의 송년회에 '그래도'는 근사한 상차림, 눈이 부신 파티룸, 고급스러운 요리의 당위에 편들지 않기를 바란다면 큰 욕심일까.


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  

유붕자원방래불역락호  <논어>


멀리서 벗이 찾아오니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과 함께하는 것만으로 벅차 손을 맞잡은 그 시간조차 아껴 즐거워할 사이라면 프랑스요리를 먹든 분식집 떡볶이를 먹든 무슨 상관이 있으리오. 무엇을 먹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함께 먹는 이가 누구냐가 중요한 것임을 잊지 않으며 인연을 소중히 여기자 마음먹어본다. 만나지는 못해도 올해가 끝나기 전, 멀리 떨어진 이들에게 안부를 꼭 물어보리라 다짐도 한다.


쓰는 내내 마음이 무거워 차마 글을 쉽게 이어가지 못한 이유가 당장 내일 잠실 롯데몰에서 브런치 작가님들과 모임이 있어서라고 비밀 아닌 비밀을 털어본다. 떡볶이 먹으러 가자고 하지 않을 테니 이 글을 읽고 부담 갖지 않으셔야 하는데 괜히 죄송하다. 마음 같아선 귀한 작가님들 모시고 매일 시세가 바뀐다는 랍스터 뷔페 이미 예약해놨는데.


禮節出自錢包

예절출자전포


예절은 지갑에서 나온다고. 참 이런 것까지 어른들 말이 옳다 하고 싶지 않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머니, 몹쓸 며느리가 되갚아드리겠어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