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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니애 Dec 28. 2023

어라? 나 분명 김장 끝났었는데

두 번째 김장이 찾아왔다

 몹쓸 며느리 글로 10만 조회수를 넘기는 감격을 누린 것도 잠시, 어느새 불안이 밀려왔다. 이걸 어쩌나, (사실 별로 큰 관심은 없겠지만) 수 만 명의 독자님들이 나를 효부로 착각하고 있겠구나!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한 분 한 분 붙잡고 설명할 수도 없고 얼토당토않은 이 깊은 오해를 어찌하나 그저 부끄러웠다.


https://brunch.co.kr/@c25c674d79184a3/17


 아직 작가명 비공개 대상인 남편이 이 글을 봤다면 이미지 세탁하냐고 그랬겠지. 더 큰 거짓말쟁이가 되기 전에 몹쓸 며느리엔 반전이 없다는 사실을 해명할 기회가 왔다.

 놀라지 마시길.

 나는 12년 차 김장김치 루팡이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기엔 너무 멀리 사는 워킹 며느리라서, 임신을 해서, 애기가 어려서, 이젠 3남매를 키운다는 갖은 핑계로 시어머니의 김치를 받아먹었다. 다음 설명을 하면 더 놀랄 테니 심장을 단단히 부여잡고 읽길 바란다. 심지어 김장날에 단 한 번도 참석한 적이 없다! 어쩌다 시간이 맞으면 남편만 대표로 한 두 번 내려보냈을 뿐, 큰집이라 손님 많은 시부모님 댁과 아들 넷 가정으로 김치를 다 보내주시는 대식구의 김장에 코빼기도 비친 적 없는 몹쓸 며느리가 여기 있다. 세상 며느리들이 다 부러워하고 시어머니들은 기가 막힐 얘기를 하나 더 붙여볼까. 할아버님과 할머님의 합동 기일에도 불려 간 적 없어서 추도예배 때 어머님이 무슨 음식을 준비하시는지 그 자리의 분위기가 어떠한지 알 길이 없는, 대한민국 1%의 간 비대증 며느리가 존재한다. K 며느리가 기일이나 제사에 정녕 한 번도 참석 안 다고? 이쯤 되면 효부가 될 수 없는 고얀 놈의 충분한 해명이 되리라 생각한다(작년 어머니 생신에도 참석을 못 했습니다).


 그랬었는데, 가만히 앉아서 다 완성된 김치를 편하게 받아먹었었는데. 올해아버님의 암 투병으로 인해 괴도짓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

 "아유 어머니 걱정 마세요, 김장이 지금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김치야 사 먹든 어떻게든 담가 먹을 테니 걱정 마세요."

 호기롭게 '마이셀프'를 주장했지만 그럴 리가. 자립이란 타인을 의지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경험과 지식의 자산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큰소리칠 때는 믿는 구석이 있는 법, 비빌 언덕은 역시나 영원한 구원 투수, 친정엄마.


옛날 엄마들은 김장을 하면서 다른 반찬도 척척 만들어낸다. 나는 요즘 엄마라 불가능.


 강원도 고랭지 배추를 한 박스 주문하고 애매하게 모자라는 듯하여 마트에서 해남배추를 또 세 포기 사 왔다. 섞박지를 담글 큰 무도 하나 사고 근처 재래시장을 들러 마른 청각과 생새우도 준비했다. 멸치 액젓, 새우젓, 고춧가루, 찹쌀가루 등등. 시어머니표 김장에 고작 20만 원 봉투로 퉁치던 괴도 공범 남편은 무슨 비용이 이렇게 많이 드냐며 그냥 사 먹는 게 가성비가 맞는 것 아니냐며 시판김치의 최저 가격을 캡처해서 내게 보여준다.

 이 남자 바보인가. 배추 20킬로 사면 김치 20킬로랑 같은 줄 아나. 알량한 김치 한쪽에 양념만 그럴싸하게 키로수를 맞춘 걸 왜 모르지. 왕년에 수학 잘했고 공대를 나온 들 아무 소용이 없다. 질량 보존의 법칙을 여기서 논하지 말라. 부재료 구매비용에 적잖은 값이 들긴 하지만 앞으로 몇 년간 두고두고 먹을 거라고, 마트에서 파는 공산품 재료랑은 비교할 수 없는 품질이라고 조곤조곤 설명하다가 마지막 훈화의 말씀을 일렀다.


 "그것 봐, 김장하는 데 배추랑 고춧가루랑 새우젓만 있으면 되는 줄 알았지? 부재료가 얼마나 많이 들어가는 줄 알아? 쪽파나 생강도 있어야지, 액젓 있어야지, 멸치다시 육수 뽑아내야 하지, 어머니는 생새우도 많이 갈아 넣고 과일도 쓰시고 해서 돈이 더 많이 드신다고, 우리 사실 꼴랑 20만 원 드려가지고 되는 일이 아니야."


 얼씨구. 김장은 시어머니께서 하셨는데 생색은 며느리가 내고 있다. 배추 대야 마주하고 고무장갑 한 번 낀 적 없는 사람이 김장 매뉴얼을 읊어대며 큰소리를 치고 있으니 재주 부린 곰의 돈 떼먹는 못된 왕서방 며느리라 해도 할 말이 없다. 그 못된 버릇은 도둑딸년 시절부터 비롯된 것, 내 집 김장인데 부산에 계시던 친정엄마가 이미 호출되어 올라오시지 않았는가. 먼 길 달려오신 50년 김치 장인, 엄마의 진두지휘 아래 생애 첫 (반) 셀프 김장이 시작되었다.


 몰랐다.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절임배추를 사 오면 그대로 양념을 치댈 수 있는 줄 알았다. 채반에 뒤집어 올려서 물기를 쫙 빼줘야 된다는 걸 몰랐다.

 건청각을 불려서 사용하는 건 줄 몰랐다. 나 혼자 시장을 봤으면 막둥이 손가락마냥 곰실곰실 통통한 생청각을 사 올 뻔했다.

 양념 속 간을 맞추는 데에 액젓 외에 국간장과 천일염도 같이 쓴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몰라요 투성이인 풋내기를 데리고 친정엄마는 많이 답답하셨다.

 "치대는 건 할 수 있제?" 

 이것도 못하면 넌 김장 수고의 지분이 없다는 빈정이 숨은 말이었다. 그래, 치대는 거야 뭐가 어렵겠어. 그까짓 거 사춘기 딸내미 기름 흐르는 두피 구석구석 샴푸 문질러 감기는 것이랑 비스무리 하겠지. 작은 대야에 배추 한쪽을 가져와 이파리 사이 중앙으로 속을 집어던졌다. 꽁꽁 싸매서 눌러 넣으면 양념이 알아서 번지겠지 싶어(깻잎 김치 담을 때처럼) 듬성듬성 속을 던져 넣었더니 엄마가 화들짝 뛰신다.

 "아이고 야야, 니 김치 한 번도 안 치대 봤나? 속을 던지고 있노."

 "응, 나 한 번도 안 해 봤는데?"

 맑은 눈을 껌뻑거리며 태연하게 대꾸하는 딸을 할 말을 잊은 채 3초간 쳐다보시더니 '니 진짜 한 번도 안 해 봤나?' 하신다. 김치 빼고는 다 해 먹는 딸이라 잠시 잊으셨나 보다. 엄마, 나 김치 오늘 처음 만들어 봐.




 숙련된 조교의 시범을 보이시며 다시 개념원리 강의가 이루어졌다. 기본을 배웠으니 유형을 다룰 차례. 김치통이 채워질수록 스킬도 늘어가고 이내 치대는 속도도 엄마를 따라잡았다. 삼 남매의 하교와 하원 시간이 다가오기 전, 모든 배추는 김치로 변신했고 청소까지 마무리되었다. 고생하신 친정엄마의 피로를 풀어드리는 코스로 지역 내 유명한 찜질방까지 다녀옴으로써 나의 첫 김장행사는 무사히 끝났다.


 끝났다. 분명 지난달에 끝났었다. 그런데 도대체 왜!


 "김장 체험 키트를 준다길래 신청했어."


  와이프를 뒤이어 독감에 확진된 남편이 쿨럭거리며 통보해 왔다. 회사에서 가족 친화 행사로 김장 키트를 나눠준단다. '가족과 함께 하는' 김장이란다. 그걸 38도가 넘는 고열로 나 죽겠네 누워 있는 사람이 말을 한다. 도대체 어딜 봐서 가족 친화 활동인지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인지는 몰라도 분명 기획자는 남자다.

 신청하고 3일 뒤 집 앞에 스티로폼 박스 택배가 도착했다. 어린이집에서 가끔 받아오기도 했던 아담한 젓갈통정도의 크기를 예상했는데 진짜 김장거리가 왔다.

 골치가 단전에서 올라온다. 남편에 앞서 독감을 앓았고 이후 체력이 회복되지 않아 가래기침을 하루에도, 아니 한 시간에도 몇 번씩 해대는 중이었다. 외출도 반드시 필요한 것 아니면 못 나갈 정도로 쉬이 피로했다. 꼼짝없이 누워 요양 중인 남편의 주말 수발까지 들어가며 독박육아 중인데 김장이라니. 분명 가족과 '함께' 하는 김장 체험인데 그 함께에 남편은 쏙 빠졌다. 내 이럴 줄 알았지.


다시 김치통을 씻고 말리고 식탁에 비닐을 깔고 소쿠리 대야 꺼내고


 얄미운 사람. 와이프 독감 치른 지 며칠 되었다고.

 남편의 뻔한 속내를 안다.

 그 비싸다는 김장김치, 회사에서 공짜로 준다는 군. 살림에 보탬도 되고 아이들은 주말에 시간 보낼 거리도 생기고. 이런 복지서비스 놓치지 않고 받아내는 내가 생각해도 참 대단해, 그랬을 것이다. 그냥 몇 포기 덜 먹고 와이프 건강 아끼는 것이 절약임을, 이 남자는 왜 모르는가.

  미루고 미루다가 절임배추 다 물러버리겠다 싶어서 식탁에 비닐을 깔며 올해 두 번째 김장이 시작되었다. 집기들을 세팅하면서 구시렁구시렁 투덜대는 아내에게 '살림에 도움 되는 걸 가져와도 불만이냐'며 한 소리 얹는다. 어머님 대신 으스대지 말 걸, 집 김치는 재료 품이 많이 들어서 원래 비용이 드는 거라고 큰소리치지 말 걸. 성찰과 함께 또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다. 동거인으로 살아가야 할 날이 한참 남은 이 남자에게 가르쳐야 할 것이 아직 많구나.  


 사춘기 딸아이는 엄마가 김장을 하든 말든 시큰둥하고 달려드는 녀석들은 어차피 아들 두 놈이다.

 "엄마, 나도 할래, 나도 할래!"

 양푼이를 각자 하나씩 들리고 배추를 건네준다.

 "이렇게 양념을 배추 잎 사이사이에 넣고 끝으로 펴서 문지르는 거야."

 개념원리를 친절히 설명하며 시범을 보여도 7세와 9세의 남성에겐 어림없다.


 "야야, 양념을 그렇게 다 흘리고 배추에 뭉탱이로 넣으면 어떡하노!"

 부엌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흥분하니 사투리도 무장해제로 튀어나온다. 김장 햇병아리 엄마 아들들 아니랄까 봐 김치 속을 던지고 엉뚱한 곳을 계속 문질러대니 듬성듬성 탈모 생긴 김치가 되어버렸다. 식탁 위엔 퍼 나르던 양념이 뚝뚝 떨어지고 아이들이 문지르던 이파리 끝부분은 곤죽이 되어가고.

 한 두 쪽 치대던 녀석들은 곧 흥미를 잃고 떨어져 나가고 수습은 무수리의 몫이 되는 것이다. 독감 기운 완전히 빠지지 않은 몸으로 소쿠리와 대야를 씻어 엎고 식탁 밑을 짐승처럼 기어 다니며 바닥을 닦아낸 뒤 무수리는 침대에 쓰러졌다.

 이보세요 기획자님, 이래도 가족 친화 이벤트라고 할 건가요?


어째 엄마와의 첫 김장 때보다 더 더러워졌다.


 생애 첫 김장인데 어쩌다가 연월로 두 번이나 하게 되었는고 숙고해 보니 그동안 김치루팡 전과짓을 한 12범이어서가 아닌가 짐작이 된다. 독감 중에 김치를 또 담그게 될 줄 알았더라면 시댁 멀다 하지 말고 12년간 몇 번은 좀 갔어야 했다. 너네 식구는 어린애가 많아서 안 오는 게 도와주는 거다 말씀하시며 조금도 서운해하거나 탓하지 않으시던 어머님이 몹쓸 며느리 때문에 얼마나 힘드셨을까. 서울 동서는 큰 행사에 얼굴도 잘 안 비춘다고 샘 부리기는커녕, 한결같이 용납해 주고 이해해 주는 형님 두 분께도 죄송할 따름이다.

 다음 가족 행사엔 꼭 내려가야지. 또 김장 두 번 하기 전에 두 배로 내려가고 두 배로 열심히 가족들을 사랑해야겠다.


 아버님 입원해 계신 병원으로 며느리가 (2할) 담근 김치맛 좀 보시라고 한 쪽 갖다 드렸었다. 맛있게 드셨다면, 어쩌면 내년 김장도 알아서 하거라 하실지도 모르겠다. 힘이야 들겠지만 루팡며느리에 도둑딸년으로 계속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온라인 고수님들과 함께 내년 김장은 100% 마이셀프로 담가보리.


 그렇지만 엄마, 도와주러 오신다면 굳이 말리지는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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