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꼬꼬 용미 Aug 06. 2024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지도....

남편을 존경하는 이유

      

남편의 첫번째 지도교수님이 새해, 설날을 맞아 대학원생과 그 가족들을 초대해 주셨다. 


중국인 교수님 댁은 싱글하우스였다. 다른 집들과도 적당히 떨어져 있어 독립적이고 넓었다. 모두가 주방에 모여 만두를 빚기로 했다. 사모님이 납작한 스테인리스 스틱을 이용해 만두피를 직접 만들어 주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만두피 위에 만두소를 넣어 자기가 원하는 모양으로 만두를 빚었다. 만두소의 재료는 고기와 부추가 주를 이루었다. 만두 크기는 그리 크지 않았다. 엄지와 검지를 딱 붙여 만든 동그라미만 했다. 


 “여기에는 행운의 메시지가 들어 있는 만두가 있어요. 그걸 먹는 사람은 한 해 운수가 대통입니다.”

만두가 다 쪄지자, 사모님이 말씀하셨다. 


 "악~"

눈군가 함성을 질렀다. 본인이 당첨되었다고 온 몸으로 기뻐했다. 포춘 쿠키(fortune cookie)에 메시지가 담긴 것처럼 만두에도 메시지를 넣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만두를 다 같이 만들었는데, 사모님은 언제 메시지 만두를 만드셨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여러 가지 음식들을 나누어 먹고 덕담을 주고받으며 분위기가 좋았다.


처음 간 싱글하우스는 좀 추웠다. 메릴랜드로 간지 6개월 만에 초대를 받은 거라 얼떨떨했고 대화에도 잘 참여하지 못했다. 어색해서 남편 주위만 맴돌았다.  어렴풋한 풍경만 기억난다. 내가 좀 더 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갔으면 어땠을까? 늘 아쉬웠던 부분이다. 내조라는 것이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이제야 생각해 본다.  


중국인 지도 교수님을 그때 처음 뵈었다. 그런데 그것이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다시 6개월이 흘러  남편유학 1년쯤 되었을 때다.  

   

 “여보, 랩(실험실)을 옮겨야 할 것 같아.”

 “왜? 무슨 일 있어?”

남편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어두웠다. 


옮겨갈 학교가 없다면 우리는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위스콘신 대학교 등 다른 대학교를 알아보고 있다고 했다. 남편은 언제나처럼 무슨 일이라고 자세히, 속 시원히 말을 하지 않았다. 남편 스타일이다. 나는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언니, 그거 알아요?”

 예쁜 8층 동생이 말했다.

 “중국인 교수님 밑에서 일하는 대학원생들은 밤 12시까지 일을 한대요. 주말도 없고 엄청 힘들다네요.”

 “뭐? 정말?”     


미국에서 살 때 가장 좋았던 점을 꼽으라고 하면? 

음~ 나는 남편의 이른 귀가와 회식이 없는 문화라고 말하고 싶다. 남편이 한국에서 회사를 다닐 때, 야근과 회식으로 늘 밤늦게 들어왔다. 아들 셋의 육아는 온전히 내 몫이었다.


그런데 메릴랜드로 와 학생이 된 남편은 6시면 칼 퇴근을 했다. 실험이 있을 때를 빼면 아이들과 주말마다 외출하고 놀아주는 것이 가장 좋았다. 이래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8층 동생 말을 듣고 알았다. 미국이라도 교수님에 따라서 다를 수 있었다. 남편은 눈치 없이 아내와 아들 셋을 달고 나와 실험실에 소홀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6시 칼 퇴근은 봐주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혼자 상상했다. 남편을 따라 나온 것이 오히려 짐이 된 것은 아닌지 혼란스러웠다.

     

위스콘신 대학교는 학생에게 지급할 예산이 없다고 거절당했다. 이 답안은 다른 주로 이주해야 하기때문에 썩 좋은 답안은 아니었다. 하지만 선택지가 사라지고 나니 아쉬웠다. 


남편은 학과 교수님들을 찾아다니며 조언을 구했다. 이때가 가장 떨리고 조마조마했던 순간들이었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박사학위를 위해 메릴랜드로 건너갔는데, 다시 한국으로 되돌아가야 하나? 기로에 서 있었다. 

    

그렇게 또 며칠이 흘러갔다.

    

유럽출신의 새로운 교수님이 남편 학과에 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대학원생을 받는다는 희소식이었다. 남편이 공부하고 싶었던 전공과 더 부합하는 교수님이었다. 멘토가 되어주신 학과장님과 면담을 통해 남편은 새 교수님의 첫 번째 제자가 되기로 했다. 우리 삶을 온통 흔들었던 불안이 한순간에 잠재워졌다.     

 

나는 남편이 6시 칼 퇴근을 하고 연구에 소홀했던 것은 아닌지 전전긍긍했었다. 우리 넷이 남편의 앞길을 막는 혹은 아닌지 안절부절못했었다. 또한 유학기간 남편이 집에서 공부하는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집에 오면 육아모드로 전환해서 엄청 가정적이었다. 이런 것들이 문제였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주어진 시간에 깊이 집중하는 스타일. 학교에서는 가르치고 연구하고 우리 넷을 잊고 집중했다가 집에 오면 아빠고 남편이 되는 것이었다. 이것이 남편 스타일이다.   

  

나중에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 남편이 고백했다. 전공에 빗겨 난 공부를 계속해야 하는지 고민했었다고. 식물의 생리학이 아니라 회사에 돌아갔을 때 도움이 될 식품의 안전성을 연구하고 싶었다고.   

   

나라면 어땠을까. 받아줄 곳이 없어 되돌아가야 하는 순간에 내가 하고 싶은 공부가 무엇인지 과연 다시 생각할 수 있었을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떠올랐다. 문을 두드리면 결국 열린다는 것을 또 알게 되었다.   

   

고민과 의문이 들었을 때 회피하지 않고 직면하는 자세, 자신의 신념과 원하는 바를 꿋꿋하게 밟아 가는 자세, 서두르지 않고 차분히 문제를 풀어가는 자세. 내가 남편을 존경하는 이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