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랑 아빠는 언제 뽀뽀해?
남편의 지도 교수님 부부와 약속을 했다.
우리 부부는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분위기 좋고 뭘 시키면 좋을까 주변을 살피며 쭈뼛쭈뼛 , 이리저리 시선을 굴리고 있었다. 새 지도 교수님으로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난 영어가 서투니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교수님 부부가 식당에 막 들어섰다. 둘은 가벼운 키스를 나누며 서로 눈을 맞추고 미소를 머금고는 우리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각자 볼 일을 보고 그곳에서 다시 만난 것 같았다.
미국에 살면서 종종 이런 장면들을 목격한다. 아들의 눈에도 자연스럽게 띄었을 것이다.
"엄마랑 아빠는 언제 뽀뽀해?"
아들이 물었다.
그러게 언제 하지? 생각도 나지 않았다. 한 번도 보고 자란 적(부모님의 스킨십) 없는 우리 둘은 아이들 앞에서 스킨십을 하지 못했다.
남편은 미국에서 꽤 긴장을 하고 살았던 것 같다. 영어를 잘해도 원어민이 아니니 한국말처럼 그냥 들리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는 것을 난 한국으로 돌아와서야 알았다. 남편이 무심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나도 육아와 언어 스트레스로 끙끙대며 살았기에 서로의 빈 곳을 채워주고 보듬어 주지는 못했던 것 같다. (급 반성)
자연스럽게 부부가 만나기만 하면 쪽쪽대는 그들의 문화가 부러웠다는 얘기다.
"Hello, Nice to meet you. "
인사를 드리고 간단한 대화를 나누고 났더니 교수님 부부와 할 말이 없다. 처음 만나는 자리에 영어가 서툴러 스스로 답답했다. 남편을 포함 그들의 대화에 선뜻 끼어들지 못했다.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몰랐다. 가끔씩 눈으로 웃었다. 다 괜찮고 알아먹고 있다는 듯.
맥주를 곁들인 식사였다. 홀짝홀짝 혼자서 맥주를 들이켰다. 운전을 해야 한다며 내게 술을 권한 건 남편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시킨 흑맥주의 도수가 8도라는 것도 나만 까맣게 몰랐다. 결국, 난 취해 버리고 말았다. 어떻게 집에 왔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식당에 가서 웃으며 식사를 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난 거실 소파에 누워 있다.
"괜찮아, 아무 실수 안 했어."
홍당무처럼 빨개진 나에게 남편은 심심한 위로를 건넸다.
메릴랜드 데이 때마다 학교에서 잠깐잠깐 남편의 지도교수님을 뵈었다. 여전히 밝은 미소와 몇 마디 인사말만 건넸다. 유럽의 여자 교수님이라 좀 다르긴 했다. 밤 12시까지 연구를 강요하지 않았고 칼퇴근하는 남편을 인정해 주었으며 아이들과 내가 아프거나 일이 생기면 남편이 언제든 달려올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다. 구글의 자유로운 분위기였다고 할까.
몇 년 후, 지도 교수님 댁에서 바비큐 파티를 한단다.
포트락(Potluck)이라~
무슨 음식을 가져가나 벌써부터 준비 모드에 들어갔다. 아들 셋 엄마는 매일 고기 요리를 했다. 특기를 살려 LA갈비와 김치 그리고 수박을 가져가기로 했다. 깻잎과 로메인, 쌈장, 고추까지 챙겨갔다.
호스트인 교수님은 새우꼬치와 올리브를, 학과장 사모님은 카프레제(토마토와 모차렐라치즈에 발사믹소스를 끼얹은)를, 남편 동료 다나는 마카로니 앤 치즈를, 에이시아는 연잎밥? 비슷한 음식을, 애나는 샐러드를, 머리는 포도를..... 가져왔다. 물론, 그냥 와도 된다. 파티는 함께 모이는 맛이다.
몇 주 아파 누워 있다 나왔더니(맹장수술), 영어는 더 들리지 않고 말도 잘 안 나온다. 인사만 나누고 방긋방긋 웃음으로 눈치껏 대처했다.
남편의 지도 교수님 댁은 아름다웠다.
새로 리모델링을 해 잘 꾸며진 부엌과 거실은 고풍스러운 외관과 다르게 현대적이고 세련되었다. 그리고 편리해 보였다. 한 마디로 부러웠다. 백 야드는 너무 탐스러운 사과처럼 예뻤다. 따서 가져 가고 싶었다. 잘 자란 넓은 잔디밭 위에 아이들의 로망인 트리 하우스가 있고 커다란 나무 가지에 걸린 그네는 교수님의 남편이 만드셨을 것 같았다. 그 옆에 미끄럼틀과 어린이용 자동차, 공놀이를 위한 낮은 농구대가 있었고 배드민턴을 위해 네트도 있었다. 건물 옆 양지바른 곳에서는 각종 허브가 자라고 있었다. 허브향은 그윽하고 향기로웠다.
교수님의 두 자녀와 우리 아들 셋은 금방 어울려 놀았다. 연령대가 비슷해 금세 친해졌다. 트리 하우스로 우르르 몰려 갔다가 그네를 타고 라켓을 들고 공을 쳐 올리기도 하면서 신나게 백 야드를 뛰어다녔다.
LA갈비가 근사한 야외용 가스 그릴 위에서 지글지글 구워지고 사람들이 야외 식탁으로 모여든다. 유럽에서 온 올리브를 지도 교수님 따라 과일 먹듯 집어 먹어 본다. 조금 짜다. 유럽 사람들은 우리가 김치를 먹듯 식탁에 올린다고 했다. 갈비가 다 되었다. 먹기 좋게 잘라 식탁에 올렸다. 로메인과 깻잎에 갈비를 넣고 쌈장을 얹어 교수님께 싸드렸더니 눈동자가 흔들린다. 깻잎 맛이 처음이라 좀 신기해하셨다.
음식을 먹으며 파티 분위기가 한껏 달아올랐다.
갑자기 지도 교수님께서 백 야드 중앙에 서신다. 제자 1호 우리 남편을 부른다.
"Congrat SH, you passed the qual!"
(SH, 퀄 시험 합격을 축하해!)
남편이 지도교수님 앞으로 나가 정중하게 인사한다.
"My daughter made a graduation cap for you."
(내 딸이 널 위해 졸업식 모자를 만들었어.)
교수님은 종이로 만든 졸업식 사각모를 남편에게 씌워준다. 종이로 만든 고깔모자였지만, 난 그것을 박사 졸업식 사각모라 부르고 싶다.
축하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남편은 샴페인을 흔들어 터뜨리고 활짝 핀 꽃처럼 웃는다.
천진한 어린아이 같기도 했고 출발선에 선 마라토너 같기도 했다. 이제 졸업 논문이 남았기 때문이다.
남편을 이끌고 힘들 때마다 돕고 지지해 주셨던 학과장님도 진심으로 축하를 전하며 포옹을 한다. 지도교수님은 자신의 첫 번째 박사 제자가 될 남편에게 축복의 메시지도 전해 주며 기뻐하셨다. 그동안 남편을 모두 지켜봐 왔기에 나는 혼자 울컥했다.
교수님의 집만큼이나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대학원실의 동료들이 함께 와서 깜짝 축하해 주니 너무너무 행복했다. 웃음꽃들이 바람결을 타고 번지고 팝콘처럼 터지고 있었다.
아 - 앙!
"엄마, 피!!! "
아이의 비명소리와 울음소리가 한순간에 마른 하늘에 날벼락처럼 울렸다......
막내 뒤통수에서 피가 흐르고 상처가 한 마디쯤 벌어졌다. 둘째와 막내가 잔디밭과 데크 사이에게 놀다가 막내 머리가 데크 모서리에 찍혔다!
남편과 나는 혼비백산, 우왕좌왕 했다. 911을 부르는 대신, 아이를 싣고 병원 응급실로 뛰었다. 여러 바늘을 꿰맸다. 흔적이 남을 테지만 머리카락은 날 거라고 했었다. 하지만, 지금도 그 자리에 머리카락은 나지 않는다. 그만큼 큰 흉터가 남았다.
무엇 하나 쉽게 넘어가는 일이 없다.
아내와 아들 셋이 딸린 가장의 유학은 끝까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
아하! 이 병원비였구나.
이제야 알겠다. <맹장 수술만 두 번>에서 나는 내 맹장 수술비와 무슨 병원비를 그렇게 많이 썼다고 맥시멈 1,000달러를 넘겼을까 글을 쓰면서도 의문이 들었다. 바로 이거였다. 응급실 방문과 처치, 약값... 병원비가 꽤 나왔을 것이다. 아이가 아프니 돈 생각은 전혀 못했다.
어쨌든, 드디어 저 높고 멀게만 느껴졌던 ‘박사 학위’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와 있었다. 졸업 논문만 써서 통과하면 된다. 그날 사람들의 축하와 웃음이 풍선처럼 날았다. 만발한 꽃밭처럼 샴페인 향과 와인의 향들이 분수처럼 뿜어졌다.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퀄 시험에 합격한 사랑스러운 남편에게 다정한 키스를 찐하게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