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속에 작은 꽃밭
레베카의 집에서 페치카에 마시멜로우를 구워 먹던 날이 떠오른다. 미국의 주택에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넓은 마당이 있고 커다란 나무에 아이들의 아지트인 트리하우스가 있고 한쪽에는 날 위한 텃밭이 있으면 좋겠다고.
레베카 집에도 큰 나무가 있었다. 나무에는 그네 비슷한 것이 있었는데, 레베카가 굵은 밧줄에 거꾸로 매달려 천진한 아이처럼 웃었다. 20대의 발랄함과 의젓함이 공존했던 멋진 친구라고 생각했다. 그녀를 만난 것이 불과 몇 달 전이었다.
청천벽력 같은 비보가 날아왔다.
그네 위에서 해맑게 웃던 레베카의 잔상이 채 식기도 전에, 아직 피지도 못한 청춘의 꽃이 꺾였다는 슬픈 소식이 전해졌다. 기차 사고라니, 이건 차라리 악몽이었으면 했다.
메릴랜드 대학교 채플에서 레베카와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과 지인들이 모였다. 소박한 추모식이 있었다. 나도 갔다. 동그랗게 서서 우리는 그녀를 위한 마지막 예배를 드렸다. 영원한 작별이라니 너무 가혹했다. 그녀의 웃는 얼굴을 떠올리며 가끔 하늘을 올려다본다. 남편의 Yeast culture 클럽 친구들은 한동안 모이지 못했다.
갑작스런 죽음은 내가 서 있는 바닥이 흔들리는 것과 비슷했다. 그녀의 꿈이 무엇이었을까. 하고 싶은 것들을 평소에 하면서 살았을까? 갑자기 떠나는 그녀의 마음은 오죽할까.... 마음이 아팠다. 또 매일 같이 만나는 남편과 그의 친구들은 얼마나 허전할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나는 쉐럴을 위해 기도해. 쉐럴이 더 이상 힘들지 않길 바라.”
쉐럴의 집에 가끔 들러 식사를 챙겨주던 안나 언니가 말했다. 얼마나 외로워 보였으면 그런 말을 했을까? 개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하는데 말이다. 언니는 뭔가를 예감했을까.
몇 년 후 어느 날, 또 한 번의 추도식에 초대되었다.
미국교회 ESL 중급반 선생님 쉐럴이 주님의 곁으로 갔다는 것이었다. 내가 한국교회로 옮기고 ESL수업도 나가지 않고 있었을 때다. 미국 교회 예배당으로 한 달음에 달려갔다. 모든 것이 다 그대로였다. 그런데,
그녀만 없었다. 믿어지지 않았다. 눈물이 계속 흘렀다.
'아무도 없이 혼자 죽음의 천사들을 맞이했을 쉐럴! 미안해요. 너무 무심했어요. 이렇게 빨리 우리 곁을 떠날 줄은 몰랐어요. 당신에게 드리운 그늘은 하나님의 곁으로 가서 사라지고 밝은 평안과 행복을 찾았나요? 그곳에서는 부디 아프지 말고 암흑처럼 보이지 않던 세상도 아름다운 눈으로 모든 것들을 다 볼 수 있기를 바라요(그녀는 시각장애인이었다).'
나는 간절히 기도했다.
교회 예배당에 그녀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그녀에게는 자매들이 많았다. 자매들과 목사님이 마이크 앞에 섰다. 친자매들이 쉐럴과의 재미난 에피소드를 간증하듯 이야기한다. 거기에는 사랑과 따뜻함, 웃음과 유머, 그녀의 습관과 고집.... 그리고 그리움과 슬픔이 모두 한 자리에 있었다. 정말 이상한 분위기였다. 멈추지 않고 계속 울던 나였다. 어느새 그녀를 생각하며 나는 웃고 있었다. 거의 2시간이 넘게 그녀를 추모하면서.
실컷 울고 웃고 났더니 눈물이 마르고 그녀와의 좋았던 추억들이 가슴속에서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났다. 한 번씩 그녀를 생각하며 내 마음 한편에 작은 꽃밭을 만들었다. 정말로 그리울 때, 그 꽃밭에 물을 주면 나는 그녀의 씩씩했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인상적인 두 번의 추도식이었다. 미국에서 장례식장을 가보지는 못했으나 죽은 사람을 아픔으로 보내지 않고 마음 한쪽을 내어 줄 수 있는 작은 꽃밭을 간직하는 법을 배웠다.
카톡이 갑작스럽게 요란하게 울려 댄다.(남편 후배의 공폰을 물려받아 와이파이가 되는 곳에서 카톡이 가능해졌다. 신세계였다.) 고모였다. 우리 엄마가 할머니를 죽였다는 무시무시한 메시지가 왔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에 눈물이 왈칵 솟는데, 엄마가 할머니를 죽였다는 말은 또 무슨 말일까.
“할머니, 나 돌아올 때까지 건강해야 해. 딱 5년이야. 꼭 다시 만나요.”
미국에 가기 전에 할머니를 만나 신신당부를 했었다.
할머니 연세가 90 가까이 되었지만, 혼자 음식도 다 해 드시고 자유부인처럼 독립적이고 씩씩하게 살고 계셨다. 시골에서 가만히 계시지 못하고 늘 뭔가를 부산하게 하고 계셨던 분이다. 나는 학교 들어가지 전에 할머니랑 6개월을 살았던 때를 기억한다. 아궁이에 불을 때기 위해 나무를 함께 하러 다녔고 그 아궁이에 고등어를 구워 먹었던 작은 밥상이 아직도 생각난다.
눈은 잘 보이지 않아도 내 생일이며 내 나이며 내가 몇 학년인지 늘 기억해 주셨던 할머니였다. 그렇게 똘똘했던 할머니에게도 치매가 찾아왔다. 혼자 자유롭게 계시던 할머니가 치매로 인해 친정 엄마 집으로 모셔지자, 할머니는 적응하지 못했다. 밤에 잠을 안 주무시고 틈만 나면 시골집에 가겠다고 밖으로 나가셨다고 한다. 엄마는 일주일 동안 꼴딱 밤을 새우고 두 손 두 발 다 들었단다. 엄마는 늘 두통을 달고 살았고 혈압 등 지병을 앓고 계시던 분이었으며 60대를 달리고 계셨다. 엄마는 잠을 못 주무시니 생활이 불가능했다고 한다.
결국, 요양병원인지 요양원으로 모시기로 했다. 외아들인 아빠도, 다섯이나 되는 고모들도, 누구 하나 감당해 낼 수 없었고 거들어 주는 사람도 없었다. 외며느리인 엄마 혼자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 아빠랑 상의해 집 근처로 급하게 모셨는데, 그것이 사달을 냈다. 시설에서 치매를 앓고 있던 할머니를 감당하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손발을 묶어 두었고 많이 싼다고 밥도 조금 주고...... 할머니는 몇 주 만에 뼈만 앙상하게 말라갔다고....
한평생 자유부인으로 살았던 할머니에게 결박은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시설에 가신지 거의 한 달 남짓만에 허망하게 할머니도 하나님 곁으로 가셨다고 한다. 장례를 치르고 한참이 지나서야 미국에 있던 내게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고 엄마는 아랫 시누이들 앞에서 살인자가 되어 있었다.
이제 할머니는 없고 집안에는 다툼만 있었다. 그저 황망했다.
그날 하루 종일 울었다. 제대로 보내드리지 못한 서운함과 가족들 간의 불화가 나를 아프게 했다. 바로 알았다고 한들 달려가지 못했을 것이 뻔하지만, 충분한 애도의 시간을 갖지 못한 것이 못내 서글펐다. 아직도 할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리다.
5년의 남편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가서 할머니 무덤을 찾았다. 소주 한 병을 올리며 하늘을 쳐다봤다.
"할머니, 저 왔어요. 거기서는 평안하시죠? 할머니 보고 싶어요."
“이 니트는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입던 옷이야.”
레베카 집에서 유럽 출신의 젊은 친구가 자신이 입고 있던 니트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말이 쉽게 잊히지 않는다. 그의 말과 표정에서 할아버지를 향한 사랑이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할머니를 그리워할 그 무엇도 없다는 것이 많이 아쉬웠다.
살아있을 때, 열렬히 사랑하자.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에게 잘하자. 하고 싶은 건 하면서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