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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꼬 용미 Oct 08. 2024

맹장 수술만 두 번

우리 병원비는 얼마였을까?

 남편은 Qual(Qualification Exam-논문자격시험)을 앞두고 있었다. 박사 논문을 쓰기 전에 의무적으로 치르게 되는 전공시험이다. 이 시험에 통과해야 논문 쓸 자격이 된다. 그리고 그 논문이 통과되면 박사학위를 받는 것이다. 거의 다 왔다.  

    

목요일, 저녁을 먹고 났더니 속이 답답했다. 체한 것 같아서 탄산음료를 마시고 엄지손가락을 땄다. 자주 체한다. 체할 때는 손가락을 따는 게 직방이다. 그런데 개운치가 않았다.    

    

금요일,  아침부터 묵직한 통증이 일더니 가시질 않았다. 통증들이 자꾸만 오른쪽 배로 모인다. 그래도 참을 만했다. 


우리 집에서 영어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유학생, 포스트 닥(박사 후 과정) 와이프들이 모여 영어공부, 요리, 쇼핑 등을 한다. 배는 계속 아팠다. '괜찮겠지, 괜찮아지겠지.' 했다. 겨우 공부를 마쳤고 동생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심상치가 않다. 오른쪽 배가 점점 더 아파졌고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토할 것 같았다.    

  

 '남편의 중요한 시험이 코앞인데, 시험 끝나고 병원에 가 볼까?'     

남편이 퇴근했다. 


"얼마나 아픈데? 맹장 아니야?"

남편은 서둘러 병원에 가잖다.  

    

 "이 시간이면 응급실에 가야 하는데? 아무것도 아니면 어쩌지?"

 병원비가 만만치 않을 텐데....

 "바보. 그럼 다행인거지. 방치할 경우 3일 안에 터질 수도 있대."

 남편이 잔뜩 겁을 준다. 

 통증이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묵직한 통증, 가슴이 답답하다, 토할 것 같다....

영어로 뭐라고 하지? 맹장은?

pressure, stuffy?  vomit, throw up? Appendix.....

그 와중에 검색으로 몇 가지 단어들을 암기했다. 

  

영어모임 동생들에게 연락했다.  한 명이 곧바로 달려왔다. 

남편과 나는 아이들을 맡기고 바로 병원으로 갔다. 


  미국에서 병원을 가자면,  본인이 든 보험사에 등록된 병원으로 가야 한다. 늘 아이들 병원에만 가봤다. 우리 보험에 등록된 소아과 의사 중 한국인 선생님 클리닉에 다녔다. 예약은 필수다.

  미국은 간판이 거의 없다. Dr. Kim's office 또는 Dr. Kim's Clinic이라고 작게 써져 있다. 정확한 주소를 찍고 찾아가야 한다. 오피스텔 건물에 사무실 하나가 의원급 병원이었다. 우리 주치의는 오피스를 두 군데 두고 있어서 요일마다 병원이 달라질 수도 있다.(미국은 땅덩어리가 워낙 커서 그런가 보다 했다)     

      

급히 응급실로 갔다. 응급실이 있는 병원쯤 되면 병원 이름에 Hospital 이 붙는다.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미국은 어디를 가든 느리고 느긋하다). 통증은 더 심해지고 있었다. 터질지도 모른다는 말에 내 가슴은 타들어 갔다. 


자정이 넘어서 의사를 만났다. 나는 아파했고 남편이 옆에서 통역을 했다. 그제야 CT를 찍고 소변검사와 혈액검사를 했다. 새벽 3시가 넘었다. 


"맹장염입니다. 수술이 필요합니다."  


‘남편 시험은 어떡하지?’

수술보다 시험이 더 걱정되었다.  다음 날까지 수술을 기다렸다.      


토요일, 아침에 침대에 누워 수술장으로 들어간다. 무덤덤하게 따라오는 남편에게 손을 내밀었다.  미국에서 셋째를 낳을 때 한번(자연분만), 다시 수술장으로 들어간다. 전신마취라고 하니 혹시나 눈을 뜰 수 있을지 덜컥 겁이 났던 것이다.  갑자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의사는 괜찮을 거라고 했지만, 나는 달달 떨고 있었다. 

차가운 수술대 위에 있으니 아이들 얼굴이 차례로 떠올랐다. 


“I’m so cold.”

간호사가 블랭킷을 덮어 주었다.  

   



 “깼네? 정신이 들어?”

남편 얼굴이 훅 다가왔다. 난 회복실에 와 있었다. 복강경 수술로 배꼽에 하나, 그 밑으로 두 개의 구멍이 더 생겼다.  처음 봤을 땐 어리둥절했고 아픈 줄도 몰랐다. 


내일이면 집에 갈 수 있다는 말에, 그제야 안심했다.    

  

점심으로 주스와 젤리가 나왔다. 거기에서는 방귀의 여부를 묻지 않았다. 저녁인지 아침인지 미국식 식사가 나왔다.    

수술 후, 레귤러 식사


  

 “여보, 아이들은?”

 “응, 6층 SH가 아이들 밥도 주고 목욕까지 시켜줬대.”

쉽지 않았을 텐데..... 눈물 나게 고마웠다.       


일요일 오후 2:30. 드디어 집에 왔다. 아들 셋이 달려들어 격한 환영을 해 준다. 아이들을 보니 힘이 났다. 막내가 엄마 없이 이모들과 잘 지냈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나를 아는 지인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우리는 수술 무용담과 담소를 나누며 배꼽을 잡아야 했다. 


 “안 돼. 그만 웃겨. 수술 부위 터질 것 같아.”


그 사이 한쪽에서는 닭을 삶아 닭죽과 닭 칼국수를 내놓았다.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음식을 나누어 먹고 헤어졌다.     

 

남편의 Qual 시험은 교수님들의 배려로 일주일가량 늦춰졌다.   

     

 그런데, 4개월 뒤….     


 남편이 배가 아프다고 했다. 남편을 데리고 병원으로 갔다. 기시감이 느껴졌다.  

 설마 맹장염은 아니겠지. 


 그러나,


 “맹장염입니다. 바로 수술해야 합니다.”

 

정확히 4개월 후 같은 날, 25일에 남편도 맹장 수술을 받았다. 담당의는 Dr. Conrad, 같은 의사다.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와야 할 사건이었다. 


"뭘 잘 못 먹은 거냐?"

"전염성이 있는 거야?" 

여러 억측들이 있었다.

    

내가 먼저 수술을 해 정말 다행이었다. 병원 위치도 알고 수술 후 남편 돌봄과 아이들 돌보는 것까지 다 혼자 할 수 있었다. 내가 집에서 아이들을 챙기는 동안 남편은  혼자 있었고  다음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갔더니 수술은 끝났고 남편을 회복실에서 만났다. 


수술 직후부터 남편은 걷기 연습을 하며 빠르게 회복했다. 그도 주스와 젤리를 먹었고 세 번째부터는 레귤러 식사가 나왔다. 


“여보, 내가 병원에서 먹던 이 밥이 그렇게 먹고 싶었어?”

 “응.”

우리는 농담을 하며 웃었다. 


수술 후, 세끼만에 받은 레귤라 식사

     

우리 병원비는 얼마였을까.  

  

Surgery Summary of Charges (May 25. 2013)    

Operating room  -  2,269.67

Laboratory       -         191.11

Cardiology       -          42.19

Radiology        -         351.79

Anesthesia       -        607.51

Supplies         -       2,957.46

Pharmacy        -        387.41

Emergency Dept  -   555.29

Admission        -          71

Room & Bed    -         781      

                                                                                     

Total Charges     = $ 8,214.43  (당시 환율 1,100원 => 약 900만 원)   

 

가계부에 근거한 나의 맹장수술 병원비다. 학교 보험이 들어 있어서 보험사에서 커버해 주고 우리가 지불해야 하는 비용은 10%, 약 820달러(약 90만원)였다. 여기에 남편까지 수술을 했으니, 두 배겠지?     


그런데 아니었다.     


내가 수술을 한 것만으로 일 년에 지불해야 할 의료비 맥시멈을 넘겼단다? 우리의 1년 본인부담금 맥시멈이 1,000 달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무것도 몰랐는데, 병원에서 알아서 처리해 주었다.   


그래서 남편 수술비는  0 달러. 

보험사에서 다 커버를 해주어 본인부담금을 절약한 것이다. 공짜로 수술을 한 셈이다.  

    

무슨 계산법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나는 쾌재를 불렀다. 4개월 만에 악몽이 재현되어 신문에 날 일이라고 했는데, 같은 해에 수술을 하는 바람에 돈을 아낄 수 있었다고. (어차피 할 수술이라면 같은 해에? 늘 행운이 함께 했다.) 


6층 동생부부가 우리 집에서 함께 자고 아이들 셋을 돌봐주었다. 밥 챙겨주고 씻기고 잠자리도 봐주고 놀아주고 안심시켜 주고…. 덕분에 갑작스러운 엄마, 아빠의 첫 부재를 아이들은 잘 받아들여 주었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감동의 눈물이 주책없이 흘러내렸다


타국에서 친구들의 정을 흠뻑 느꼈다. 


언제든 도와주고 아플 때 달려와 주는 친구가 있다는 것이 너무너무 소중했다. 우리는 만나고 밥 먹고 일상을 공유하고 이야기하며, 늘 서로를 들여다보았다. 가장 힘들었을 때를 함께 했던 친구들을 사랑한다.  


우리는 지금도 매년 두 번씩 만난다. 




* 미국의 보험은 내는 보험료에 따라 보장범위가 다르다. 우리는 치과보험을 뺐고 co-pay(갈 때마다 내는 기본 진료비)가 15달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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