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이야!
메릴랜드 주 아룬델 밀스(Arundel Mills-아웃렛 쇼핑몰) 안에 있는 배스 프로 숍을 좋아했다. 낚시 체험, 암벽등반 등의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이 특히 좋아했다. 가끔 몰에 가면 참새 방앗간처럼 들렀다.
"뭐 해?"
남편이 배스 프로 숍 한 귀퉁이서 한참 귀를 기울이고 있다.
"딜이야! 10일 숙박권이 600달러래!"
"설마? 그냥?"
"플로리다 콘도에서 2-3시간 분양광고 설명회에 참석해야 한다네."
"거봐. 공짜는 없어."
"나 혼자 듣고 오면 되지. 1박당 60달러라 잖아."
목돈이었지만, 남편은 바로 구입했다.
그해 크리스마스 때, 디즈니 월드로 여행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 초등학교에서는 3월에 봄방학을 한다. 이때, 아이들이 가장 많이 가는 곳이 '디즈니 월드'라고 아들이 말했다. 크리스마스 때도 '디즈니 월드'에 많이 간단다. 내내 모른 척했다. 언제가 아이들의 꿈을 꼭 이루어 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드디어, 2014년 12월에 디즈니 월드에 가기로 했다.
디즈니 월드의 티켓 값은 1인당 100달러에 육박했다. 다섯이면 하루 500달러였다.
허걱....
'하지만 남편 논문만 통과하면 한국에 돌아갈 텐데, 언제 다시 올 수 있겠어. 한국에서 온다면 비행기표에, 숙박비에.... 지금 가는 게 싼 거야.'
내 마음을 진정시켰다.
한 끼도 사 먹지 않겠어!
준비할 게 많았다. 일주일 동안 먹을 음식들을 모두 챙겼다.
새벽 4시에 일어났다. 전날 아이들에게 잠옷 대신 외출복을 입혀 재웠다. 바로 차에 태우기 위해서다. 플로리다 주 올랜도까지 13시간 넘게 걸린다. 비용과 시간을 아끼기 위해 우리는 쉬지 않고 하루에 가기로 했던 거다. 아이들이 잘 때 많이 달려야 했다.
조리가 안 되는 호텔에서 우리가 늘 먹는 메뉴가 있다. 고추참치 파래 비빔밥! 주둥이가 큰 전기주전자에 햇반을 넣고 10분간 데우거나 세면대 구멍을 막고 뜨거운 물을 붓고 햇반을 여러 개 한꺼번에 데운다.(호텔에 전자레인지가 없을 경우) 햇반을 열지 않고 그대로 데우면 외출 시 가지고 다니며 먹을 수도 있었다.
해가 떠오르자 아이들이 하나둘씩 일어나 배가 고프단다.
미리 싸 온 5인분 햇반을 커다란 밀폐용기에 넣고 고추참치 2개와 야채참치 2개(어릴 때만 야채참치를 넣고 크면 고추참치만 넣음) 그리고 파래볶음(또는 김자반)을 넣고 비볐다. 근사한 고추참치 파래 비빔밥이 된다. 햇반 용기에 1인분씩 나누어서 아이들에게 준다. 운전하는 남편은 내가 먹여주었다. 조금 불편하지만, 은근히 색다른 경험이다. 연애 때도 그랬다. 퇴근하고 바로 차에 올라 김밥을 먹으며 우리 둘은 스키장으로 달렸었다.
그렇게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렸다. 아들들은 쉬가 마려워도 빈 물병만 있으면 차에서 해결이 되었다. (이건 절대 따라 하면 안 될 듯^^;)
우리는 70마일이 넘는 속도로 거의 하루 종일 달렸다. 남편은 내게 운전대를 맡길 수 없다며 고집스럽게 혼자 했다. 나는 아이들을 챙겼다. 중간중간 간식을 먹이고 끝말잇기, 스펠링말하기, 노래 따라 부르기 등으로 시간을 채웠다. 한국에서 가져온 시디 안의 노래를 아이들은 다 외웠다. 아이들이 큰일을 보고 싶거나 남편과 내가 화장실을 가고 싶을 때, 잠시 멈췄다.
별이 총총 떠 있고 캄캄한 밤이 되어서야 올랜도에 도착했다. 10일 숙박권 중 4박을 여기서 사용하기로 했다. 성처럼 생긴 멋진 콘도단지였다. 넓고 고급스러운 방 2개와 화장실 2개, 거실과 세련된 부엌, 세탁기와 건조기까지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진 럭셔리, 그 자체였다. 방마다 널따란 침대가 있었고 부엌에는 6인용 식탁도 있었다.
플로리다 여행은 일주일!
4일은 올랜도 디즈니 월드와 씨 월드, 그리고 3일은 플로리다 주 최남단 에버글레이즈 국립공원(Everglades National Park)에서 캠핑을 계획했다.
첫째 날, 디즈니 월드가 문 여는 시간에 맞추어 갔다. 매직 킹덤 파크(Magic Kingdom Park)에는 디즈니 영화의 첫 장면에 나오는 디즈니 꿈의 성이 있었다. 팅커벨이 날아다니고 반짝이는 금가루를 뿌려 줄 것만 같은 꿈의 궁전이었다. 아침부터 밤에 문을 닫는 시간까지 되도록 많이, 다 보는 것이 목표였다.
아들 셋과 놀이기구를 타고 공연시간에 맞추어 공연을 보러 갔다. 퍼레이드를 따라다녔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캐릭터를 찾아 쫓아다녔다. 놀이기구를 기다리는 일마저도 행복했고 꿈만 같았다. 13시간 넘은 운전과 나흘 동안 걸어 다닌 거리를 합하면 지금 체력으로는 상상도 못 할 노동이었다.
얼마나 고대했던 여행인가. 우리는 지칠 줄 몰랐고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돌아다니며 모든 것들을 눈에, 마음속에 담아 가려고 애를 썼다.
아침은 숙소에서 먹고 도시락을 싸서 다녔다. 하루는 간편한 김밥을 쌌고 한 번은 유부초밥을 가져갔으며 햄버거나 샌드위치를 만들어 다니기도 했다. 돌아다니면서 때론 기다리면서 도시락을 먹으니 시간도 절약되었다. 유부초밥을 들고 돌아다닌 기억이 선명하다. 부끄럽거나 이상하지 않았다. 우리를 아는 사람도 없고 햄버거나 핫도그를 먹으며 돌아다니는 것이 그들의 문화였기 때문이다. 난 자유로웠고 거리낄 것이 없었다.
플로리다 여행 7일 내내 한 번도 식당에 가지 않았다.
막내가 만 4살이었는데, 롤러코스터를 처음 타고 잔뜩 겁을 집어먹었다. 아빠를 닮아 놀이기구를 잘 타지 못한다는 걸 그때 알았다. 할리우드 스튜디오(Hollywood Studios)의 각종 무대 공연과 퍼레이드가 있었다. 시간을 체크해서 보고 싶은 공연을 관람하고 환상적인 거리를 하루 종일 돌아다녔는데, 피곤한 줄 몰랐다. 그때 우리는 너무 젊었다. 매일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보는 우리가 영화 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곳에 오는구나 싶었다.
한국의 에버랜드 사파리는 아직 못 봤지만, 미국 플로리다 사파리 투어는 해봤다. 애니멀 킹덤 테마 파크(Animal Kingdom Theme Park)에서는 차를 타고 광활한 초원을 달리며 동물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기린, 코뿔소, 하마, 치타, 코끼리, 플라밍고 등 수많은 동물들을 직접 봤다. 아프리카 사바나에 온 기분이었다.
라이언 킹 뮤지컬은 최고였다. 뉴욕에서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보지 못한 한을 이곳에서 풀었다. 환상적인 무대에 매료되어 한 순간도 눈을 떼지 못했다. 그저 신기했고 신났다.
캘리포니아 주 리버사이드에 살 때, 샌디에이고 씨 월드에 갔었다. 그래서 플로리다 주의 씨 월드도 꼭 다시 가고 싶었던 거다. 집채만 한 범고래(Killer Whale)를 다시 만났다. 조련사의 지시를 따라 움직이는 범고래의 공연은 압권이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의 주인공 아니던가.
마트에서 장을 보기도 했지만, 거의 다 집에서 싸 온 음식으로 끼니들을 해결했다. 코스트코에서 사 온 덩어리 고기와 박스째 들고 온 과자와 음료가 있어서 못 먹고 다닌 것은 아니다. 현지의 비싼 점심과 저녁을 사 먹지 않았을 뿐이다.
디즈니 월드는 늘 미안했던 아이들에게 숙제와도 같은 여행이었고 선물이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 인기 있는 놀이기구를 타자면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기다리는 아이들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 우리 부부의 마음에도 행복이 꽃처럼 피어났다. 4일 동안 아주 멋진 날들을 보냈다.
이제 꿈속에서 나와 현실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다음 일정은 야생 악어들이 득실거리는 에버글레이즈 국립공원이다. 올랜도에서 4시간을 더 달려 내려갔다. 미국 땅이 진짜 넓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미국의 거의 최남단까지 간 것이다.
곳곳에 악어 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푯말들이 있었다.
'그 무시무시한 악어를 먹는다고?'
등골이 오싹했다.
에버글레이즈 국립공원에 도착했다. 물속에 숨어 있는 악어들을 구경했다. 어디서 악어가 튀어나올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신경이 바짝 곤두서 있었다. 다행히 거리가 가깝지는 않았다. 물속에 눈만 내밀고 숨어 있는 야생의 악어들을 실컷 봤다.
날이 저물자, 우리는 캠핑장으로 갔다. 캠핑장 입구에서 사람들을 만났다. 남편이 몇 가지 물어보기로 했다. 차를 세우고 문을 잠깐 열고 밖을 살폈다. 그런데, 그 잠깐 사이에 차에 있는 막내가 모기떼의 습격을 받았다. 막내 이마에 손가락 한 마디 굵기의 큰 혹이 세 개나 부풀어 올랐다.
그제야 뭔가 잘못된 것을 알았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들은 양봉업자들이 쓰는 네트모자와 네트가운을 입고 전신을 보호하고 있었다. 남편은 남자들과 몇 마디를 나누고 막내를 보더니 갑자기 차문을 닫고 뒤도 안 돌아보고 차를 몰고 나온다. 도망쳤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아이들과 그곳에서 도저히 잘 수 없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남편이 그렇게 신속하게 움직인 것은 처음 봤다.
캠핑을 취소했다. 졸지에 숙소가 없어진 우리는 공짜 와이파이를 찾아다녔다. 스타벅스나 맥도널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숙소를 찾았다. 당일 숙소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겨우 찾은 숙소는 100달러짜리 여관(Inn)이었다. 정말 후졌다. 럭셔리 콘도는 60달러였는데, 100달러짜리 여관 방은 형편없는 수준이다. 천당과 지옥 같은 온도차였다. 그래도 모기가 득실대는 캠핑장보다는 100배 나았다. 저녁은 마트에서 치킨과 빵을 사 와 때웠다. 다음날 아침은 시리얼과 우유, 바나나를 먹었다.
계획을 변경했다.
우리는 마이애미비치로 갔다.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비취색 바다 언저리에서 아이들은 뛰어다니며 파도와 놀았다.
“엄마, 소금물이가, 소금물이가 눈에 갔어.”
막내가 서툰 한국말로 소금물이 눈에 들어갔다고 말한다. 이 동영상을 몇 번이고 돌려 본다. 어깨가 떡 벌어진 중3, 사춘기 막내가 그때는 이렇게 작고 귀여웠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마이애미비치에서 차로 5시간쯤 위로 달려 세인트 어거스틴에 갔다. 미국은 도시마다 유럽의 점령당한 나라의 색깔이 묻어난다. 세인트 어거스틴은 스페인의 지배를 받아 도시 전체가 작은 스페인처럼 보였다. 빨갛고 예쁜 등대와 뮤지엄, 돌로 쌓은 성벽들이 아주 고풍스러웠다. 유럽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
근처 사립 캠핑장, 통나무 캐빈에서 2박을 보냈다. 흔들 그네와 수영장, 모닥불, 하늘의 별들, 까만 밤하늘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일주일간의 긴 플로리다 여행을 마쳤다.
남편은 어릴 때, 주인집 눈치며 층간소음 때문에 주말마다 아버님과 밖으로 나갔다. 물고기 잡으러 다슬기 잡으러 강으로 시내로, 들로 산으로 돌아다녔다. 어머님은 늘 음식을 싸 갖고 다녔다. 목수인 나의 아버지는 비가 오는 날만 쉬었다. 그래서 여행을 해 본 적이 거의 없다.
우리 둘이 만나 결혼하고 아이 셋을 낳고 거침없이 여행을 하고 다녔다. 그런 배경이 없었다면 우리는 절대 미국에서 여행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다섯 식구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소중한 여행이다. 유일하고 특별한 추억이다.
<NO 외식, 플로리다 여행경비 결산>
- 숙소비용 = 60달러 4박 + 100달러 인 + 캐빈 2박
- 디즈니 월드(4개 중 3개 테마타크만 봄)와 씨 월드 입장료 = 대략 500달러 × 4일
- 에버글레이즈 국립공원과 세인트 어거스틴 뮤지엄 등의 입장료
- 기름 값
- 코스트코와 한국마트에서 장보기
*P.S. 플로리다 콘도에서 남편은 콘도 분양광고 설명회에 갔으나, 듣지 않아도 된다고 바로 돌아왔다. 아마 외국인이고 그것을 살만큼 돈이 많아 보이지 않았나 보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