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방일지
“누구세요?”
찬찬히 얼굴을 들여다보니 분명 내 남편, 아이들 아빠가 맞다? 내가 없는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일요일 아침. 아이 둘과 한국교회를 갔다. 유일하게 걸어갈 수 있고 또래 친구들과 한국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며 점심까지 해결할 수 있으니, 남편이 차로 데려다주지 않아도 셋째를 임신 중이라도 기를 쓰고 갔었다.
남편 회사의 파견근무로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에 따라가 살 때다. 우리 부부를 소개해 준 단짝 친구 부부가 1년 먼저 가 살고 있었다. 내 단짝과 갓 결혼한 친구 남편은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고, 그 외에도 남편 후배 부부가 서너 쌍 더 있었다. 약속을 하지 않아도 일요일마다 교회에 가면 만날 수 있었다. 영어 한마디 내뱉지 못하던 내게 그곳은 천국이었다. 미국 생활 정보를 얻고 힘든 마음을 공유하고 나누었다.
게다가 목사님의 좋은 말씀을 듣고 목청껏 찬송가라도 부르고 나면 영어 못하는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그 자체가 태교였다. 우리 아이들도 친구들을 만날 수 있고 한국말로 맘껏 소리치며 뛰놀 수 있다. 권사님, 집사님이 차려주는 밥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듯 반가운 것이었다.
임신 중이니 먹고 싶은 게 얼마나 많았겠는가. 엄마의 손맛을 비슷하게나마 느끼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들이 흥분해서 현관문을 활짝 열고 뛰어 들어간다.
“아빠! 아빠!”
그런데, 웬 깍두기 아저씨가 소파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누구세요?"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미국에서는 미용실 비용이 비싸다고 수도 없이 들었다. 친구도 자기 남편 머리를 잘라 주고 친구는 머리를 그대로 길어서 묶어 올렸다. 우리도 바리캉(프랑스어, bariquant)을 샀다. 그리고 남편이 아이들 머리를 깎아주는 걸 옆에서 몇 번 지켜보았다. 한국에서 이발병이었던 시동생이 우리 아이들 머리를 깎아주는 것도 봤다. 그게 다였던 나에게 남편이 바리캉을 내밀었다. 아이들이 모두 잠든 토요일 밤이었다.
“자. 당신이 내 머리를 잘라 줘.”
“뭐? 내가? 한 번도 안 해봤는데?”
“괜찮아. 나 하는 거 봤잖아.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우리 둘뿐인데, 한 사람이 시키면 해야 할 판이었다. 남편은 홀딱 벗고 욕실 안으로 들어가 발판 의자에 쪼그리고 앉았다. 자기 얼굴만 한 거울을 들고 내게 지시를 내렸다.
"먼저, 머리카락 전체를 3센티미터씩 잘라."
느닷없이 나는 미용사가 되어 남편의 머리카락을 가위로 자르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을 두 손가락 사이에 넣고 쭉 잡아당겨 마지막 3센티를 잘랐다. 정수리부터 자르고 이쪽저쪽 옆머리, 뒷머리 모든 머리카락을 고르게 자르라고 했다.
“좋아. 좋아. 잘했어.”
“이제는 이걸 끼우고 바리캉으로 밀면 끝이야.”
말은 간단했다. 밀리미터 단위로 여러 캡이 있다. 남편은 3밀리미터 캡을 바리캉에 끼워 내게 주었다. 처음에는 손이 발발 떨렸다. 천천히 바리캉을 밀어 보았다. 속도가 느려서 그런지 머리카락이 자꾸 먹히고 뜯겼다.
“괜찮아. 과감하게 해!”
남편 말에 힘을 주어 속도를 내본다. 캡이 있으니 위로 올리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끄트머리에서는 바리캉을 살짝 들어 올리며 최선을 다해 밀어주었다.
맨 아래쪽은 1밀리미터의 짧은 캡을 끼워 다듬듯 마무리를 하라고 했다. 이것은 머리카락에 닿자마자 사정없이 잘렸다. 헉! 뒤통수 한쪽이 하얗게 두피가 드러났다. 최대한 티를 내지 않았다.
"다 했어."
내 목소리가 작아진다.
“처음 한 것 치고는 괜찮네. 잘했어.”
남편은 거울 속의 자신을 이리저리 들여다보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점점 더 나아지겠지. 수고했어.”
휴~ 긍정적인 남편이 나를 격려해 주었다.
그런데!!!
일요일 아침까지만 해도 아무 말 없던 남편이 우리가 교회 가고 없는 사이 자기 머리를 셀프로 2밀리미터 바리캉으로 온통 밀어버린 것이다! 소파에 앉아 있는 남편은 빡빡이가 다 되어 있었다. 자꾸 민머리를 만지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나를 올려다본다. 남편 이마 주름이 건물에 난 크렉처럼 선명하고 거슬린다. 딱 반항아요. 80년대 조폭 깍두기 아저씨다. 난 경악했다.
“어제는 괜찮다며? 잘 잘랐다며? 맘에 안 들었으면 말을 하지 그랬어.”
(그렇다고 뾰족한 수가 있을까 싶지만.... 뒤통수의 하얀 땜통을 알아챘나? )
남편이 외모에 그렇게 신경 쓰는 사람인 줄은 몰랐다. 5년 넘게 살았어도 옷 투정 한번 없고 면도도 가끔 하던 사람이었으니까.
“그냥.”
얼렁뚱땅 얼버무리며 넘어가려고 한다.
“싫어 싫다고! 짧은 스포츠머리는 당신한테 어울리지 않아!”
내가 다 울고 싶었다.
차라리 미용실에 가지. 대체 헤어컷 비용이 얼마길래? 이러는 건지. 정말 속상했다. 회사에 나가야 하는 당신은 미용실에 가도 될 텐데…
나중에 친구에게 얼핏 들은 헤어컷 비용은 25달러(?)였던 걸로 기억한다. 물론 미용실마다 가격은 천차만별이겠지만, 아이 둘과 성인 둘이면 100달러.(좀 많긴 하다.^^;) 여자 머리는 더 비싸다고 한다. 허걱, 미용실 갈 엄두를 못 냈다. 주위에서 미용실 다닌다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을 정도다.
“다시는 그렇게 자르지 마! 한 번만 더 그러면 이혼이야!”
엄포를 놨다. 남편 외모 보고 결혼한 것은 아니었지만, 날카로운 눈빛과 스포츠머리 그리고 깊은 이마 주름은 섬뜩한 인상을 만들고 강한 거부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때 유튜브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아무것도 모를 때다.(2008년)
그래도 다행인 것은 머리카락은 매일 자란다는 것이다. 남편은 아이들 머리를 자를 때, 내게 더 세심하게 알려주었다. 남편도 시동생에게 배운 솜씨 같은데, 제법 잘 잘랐다. 나도 점점 머리 자르는 것에 익숙해졌다. 이렇게 배운 실력이 조금씩 자라서 메릴랜드 유학 5년 동안 남편과 아이들 머리까지 다 내가 잘랐다.
공짜라고 하니 옆집 공대 박사님이 내게 머리를 맡겼다. 그때 처음 알았다. 사람마다 모발의 결과 굵기, 숱이 다 다르다는 것을. 미용은 다양한 경험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 박사님 이후로 다른 손님은 받지 않았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말이 있으나) 나는 내 머리도 내가 잘랐다.
여자들은 긴 머리라 자르기가 더 쉽다. 처음에 내 친구가 와서 내 머리를 단발로 잘라 주고 갔다. 뭔가 어설프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거울을 볼 때마다 이쪽 조금, 저쪽 조금 매일 다듬었다. 내 마음에 들 때까지 일주일쯤 잘랐더니 내 머리는 긴 단발에서 커트 머리가 되었다.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커트 머리다. 다른 기술은 모른다. 딱 그 스타일만 안다. 단발에서 약간 층을 내 다듬은 그 스타일 하나. 난 미국에서 6년(캘리포니아 1년, 메릴랜드 5년)을 그렇게 살았다. 미국에 1년만 더 오래 살았다면 파마 기술을 배웠을지도 모르겠다.
메릴랜드 그린벨트, 우리 동네를 산책하다 보면 앞마당에서 부모가 아이 머리를 잘라 주는 모습을 종종 보곤 했다. 특별할 것 없이 많이들 그렇게 한다.
나중에 나중에 한국에 와서 알았다. 큰아들은 짧은 상고머리가 그렇게 싫었다는 것을. 장발을 원했다는데 말도 못 하고 얼마나 답답했을까. 큰아들은 미국에 살던 그때의 머리 스타일을 흑역사로 기억한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한동안은 아이들 머리를 잘라 주었다. 아무 생각 없이 습관처럼. 팬티만 입고 화장실에 쪼그려 앉아 있던 5학년 큰아들이 그제야 반항을 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여기 한국이지!! 이후, 네 남자를 모두 미용실로 보냈고 나는 우리 집 미용사에서 해고되었다.
비로소 자유를 얻으며 해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