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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꼬 용미 Jun 25. 2024

미국에서 운전면허 따기

필기시험만 여섯 번,  주행시험은 한 번에



대학1학년 여름방학 때 친구들은 운전면허를 땄다. 비용이 오른다는 예고 앞에 서둘러 따는 분위기였다. 나는 운전기사가 딸린 차를 타고 다니는 게 꿈이라며 애써 외면했다. 대중교통이 잘 되어 있고 자차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드라마 속 사모님이 되길 바랐다. 하지만 이것은 미래를 보는 눈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어리석고 무지한 생각이었다.


미팅으로 만난 남자는 첫날부터 나를 데려다주었다. 남자의 차는 오래된 프라이드였다. 차의 외모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의 기사가 되어 줄 사람이라는 것이 더 중요했다. 우린 커플이 되었고 서울 천호동과 수원 율전동을 오가며 연애했다. 그는 내가 부르면 언제든 달려왔다.  사랑하는 기사가 생겼고 나는 그의 차에 길들여졌다.  


결국, 여행을 좋아하고 나를 어디든 데려다주는 그와 결혼했다. 그는 우리 가족을 미국으로 데려갔다. 남편회사에서 파견근무를 보낸 것이었다.

  

나는 아무런 무기? 없이 무작정 남편을 따라갔다.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로!     


나는 운이 좋았다. 친한 친구가 1년 전에 먼저 그곳에 둥지를 틀고 있었다. 그 친구의 도움으로 미국에 도착한 다음 날, 한국어로 된 운전면허 필기시험을 볼 수 있었다. 1년을 살아도 현지 운전면허가 필요하다고 했기 때문이다. 남편과 나는 전날 친구가 준 시험지를 한두 번 읽고 가서 미국 운전면허 필기시험에 한 번에 합격했다.


문제는 실기였다. 당시 캘리포니아는 운전 학원을 다니지 않아도 운전만 가능하면 실기주행시험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남편은 후배의 도움을 받아 주행코스만 익히고 시험을 봤다. 한국에서 10년 넘게 운전을 했지만 한 번 떨어지고(대부분 한 번은 떨어진다고 한다) 두 번째에 합격해 미국 운전면허를 땄다.      

 

그다음은 나였다. 운전을 배운 적 없는 나는 남편에게 운전을 배웠다. 밤에 공터에서 연습했고 가끔 도로로 나갔다. 조금씩 익숙해졌고 신호를 익힐 겸 가까운 동네마트까지 갈 수 있게 되었다. 필기시험 합격자는 운전면허가 있는 사람이 옆에 동승할 때만 주행연습을 할 수 있다. 우리는 두 아이를 맡겨야 가능한 일이었다.


주행시험을 보기에는 연습량이 충분하지 않았고 모든 게 조심스럽고 두려웠다.  그때 시험을 봤다면 미국인 감독관의 지시를 알아들을 수 있었을까?     


그러다 진짜 폭탄을 만났다. 생각지도 못했던 임신! 입덧이 시작되었다. 안전을 위해 서툴렀던 나의 운전은 중단되고 말았다.


1년 파견근무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남편은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를 하고 싶어 했고 학교를 찾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한국에 있을 때 필기시험을 봤고 또 한 번에 합격했다. 하지만 백일도 안 된 아기를 남의 손에 맡기고 운전학원을 다닐 수가 없었다. 그리고 미국에 가면 어차피 다시 운전면허를 따야 하지 않던가. 살짝 미뤄 두기로 했다.    

   

그런데……     

우리가 계획한 캘리포니아 주가 아니고 메릴랜드 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당시 메릴랜드 주는 한국면허증을 미국면허로 바꿔 주는 유일한 주였다.


아뿔싸…

한국에서 운전면허를 따갔어야 했다. 모르면 손발이 고생한다고 ,  대학교 때 땄어야 했다. 한국에서 한국말로 운전면허를 따갔어야 했다.  


나는 뚜벅이로 2년을 살았다.  

    

미국의 긴 여름방학 동안 우리는 걸어서 매일 도서관에 갔다. 습하진 않았어도 40도가 넘는 여름 날씨에 유아차를 밀고 끌며 3살, 5살 된 아이를 걸려서 30분씩 걸어 다녔다.  도서관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책을 읽으며 하루를 보내고 도서관 옆 마을 협동조합마트에 들렀다. 세일하는 간단한 간식과 우유를 사 유아차 바구니에 싣고 걸어서 돌아왔다. 운전을 못하는 내가 걸어서 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차가 절실했다. 카시트 때문에 남의 차를 얻어 탈 수도 없었다. 넷이나 되는 혹은 너무 컸다. 나는 운전면허를 따게 해달라고 남편을 졸랐다.

    

드디어 운전면허 따기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먼저, 영어 필기시험을 세 번 봤다. 세 번 다 떨어졌다. 그제야 한국어 시험에 응시할 기회가 주어졌다. 한국어 시험이야, 단번에 합격했다. 그러니까 운전면허 필기시험을 여섯 번을 본 것이다. 


그다음은 운전학원이다. 메릴랜드 주는 학원을 다녀야 했다. 10일 동안 세 시간씩 이론 수업을 먼저 들었다. 미국 10대들과 학원 수업을 들었다. 고글을 씌워주고 음주 운전을 하면 그렇게 보인다고 강한 경각심을 주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잘 알아듣지 못해서 한 번은 울음을 크게 터뜨렸던 기억도 있다. 타국에서 안 되는 영어로 수업을 듣자니 여간 곤혹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남편은 세 아이들을 데리고 나를 학원에 데려다주고 데리고 오는 수고를 10일간 해야만 했다. (미국에서는 어린아이들만 두고 나갈 수가 없다)     


다음은 주행실습이었다. 6시간이었는지 9시간이었는지 기억이 흐릿하지만, 첫 수업만큼은 또렷하게 기억한다.  운전법은 이미 남편에게 배웠다고 하자 운전강사는 첫 수업 때 초보인 나를 데리고 70마일로 달리는 고속도로로 나갔다. 운전대는 내가 잡았고 그는 옆에서 지시만 했다.


 더! 더! 더!

강사는 속도를 내라고 나를 다그쳤다. 비까지 조금 내리고 고속도로는 처음이라 정말 무서웠다. 옆에서 강사가 제어 가능한 브레이크 페달을 밟을 수 있으니 걱정 말고 속도를 내라는데 쉽지 않았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어떻게 그 시간이 지나갔는지 모르지만 나는 해냈다. 조건을 다 채우고 드디어 실전 시험을 보러 갔다. 남편과 아이 셋 모두 출동이다.


남편은 막내를 안고 아이 둘은 그 옆을 따라 걷고 잔뚝 긴장한 나는 비장하게 걸었다. 우리는 일열로 서서 운전면허 시험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때가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선명하다. 레옹 옆에 마틸다가 화분을 안고 걷던 그 장면처럼.


주행시험은 본인의 차로 본다. 내 첫차는 시에나다. 여성 감독관을 옆에 태우고 두 가지 주차시험을 보고 시내로 나갔다. 그래도 미국에서 2년쯤 살았다고 간단한 지시사항들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모르겠으면 다시 물어보고 20분쯤 시험을 치렀다.  


 합격!!


와우~ 남편과 남편후배, 내 친구 모두 한 번씩 떨어지고 합격했다는데 난 실기에서 한 번에 붙은 사람이 되었다. 온 식구가 출동해 시험을 봐야 하는 그 길을 두 번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 마음이 다 보태져서 받은 결과였으리라. 스스로 대견했다.


그러나 메릴랜드에서 이것은 연습용 면허였다. 이 연습용 면허는 18개월 동안 혼자서 운전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기간 동안 문제가 없다면 진짜 면허증을 받게 된다. 어쨌든 메릴랜드로 간지 2년 1개월 만에 운전면허를 손에 쥐었다.


세상이 달라 보였다. 아이들을 데리고 도서관은 5분이면 갈 수 있었다.

 “아들아, 엄마가 운전해서 도서관엘 오다니…….”

첫 시승식 때 무척이나 감격스러웠다.


혼자 마트도 가고 친구 집도 가고 병원도 갈 수 있게 되었다. 미국생활의 필수는 차였다. 운전이었다. 영어보다 더 운전이다. 어디든 가야 말을 할 수 있는 법이니까.  




  P.S. 

-미국 운전의 핵심은 STOP사인이다. 신호등이 없는 거리에서 STOP사인 앞에서 하나, 둘, 셋 3초쯤 꼭 멈추었다 가야 한다. 이를 어길 시에는 벌금이 세다. 경찰이 숨어있다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운전면허 시험 중 후진할 때는 어깨너머로 고개를 한껏 돌려 뒤를 돌아보아야 한다. 룸미러나 사이드 미러만 보아서는 안된다고 친구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해 주었다.

-주차시험은 미국에서 많이 하는 파라렐 파킹과 백 파킹이었다. 주차 시, 도로의 노란 선이나 빨간 실선이 있는 곳에는 절대 안 된다. 소화전이 있는 곳도 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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