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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꼬 용미 Jun 18. 2024

결코 평범하지 않은 미국 생존기

10. 둘째 아이

   

  둘째는 1년을 집에서 놀다 만 네 살이 되어 공립 프리킨더에 들어갔다. 아침마다 형을 스쿨버스에 태워 보내고 늘 형이 오기만을 기다렸던 둘째가 노란 스쿨버스를 타는 어엿한 학생이 된 것이었다.     

 

  둘째는 뭐든지 혼자 하던 아이였다. 형을 키울 때는 손이 열 개라도 모자랐다. 젖을 떼고 났더니 낮잠을 재우느라 한 시간씩 아파트 복도에서 유모차를 밀어야 했고 밤에 재울 때는 토마스 이야기를 지어내 한 시간씩 속삭여 주어야 했지만, 둘째는 손가락 발가락을 빨며 혼자 놀다 주방 바닥에서 그대로 잠들던 아이였다. 신기했다. 설거지하는 엄마를 기다리다 엄마의 손길 없이 그저 혼자 잠이 들 수도 있다는 걸 알게 해 준 아이였다. 기면서부터 미끄럼틀에 겁 없이 올라가 혼자 내려오던 아이였고 8개월 때부터 걷기 시작해 돌잔치 때는 뛰어다니던 아이였다. 축구공을 보자마자 차고 뛰던 둘째에게 신발 끈 묶는 것을 가르쳐 준 적이 없지만, 어느새 혼자 묶을 수 있었고 잠바를 입을 때 아이는 잠바를 바닥에 펼쳐놓고 그 위에 누워 한 팔씩 팔을 끼우고 일어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서있어 모두를 놀라게 했던 아이였다. 밥을 떠먹여 본 기억도 별로 없고 안아준 기억도 별로 없다. 걷기 시작하면서 아이는 안아 주는 것보다 혼자 걷는 것을 택했다.(큰아이는 20개월이 넘도록 둘째 임신 전까지 안고 다녔다.)    

  

  2007년 둘째가 태어나던 해는 황금 돼지 띠였다. 3.3 Kg의 건강해 보이던 아이였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태어나자마자 한 선천성 대사 이상 검사에서 재검이 떴다. 다시 검사를 했는데 선천성 갑상선기능저하증이라고 했다. 갑상선(갑상샘)은 있는데 호르몬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고. 두 달에 한 번씩 피검사를 해 약의 용량을 조절해야 한단다. 매일 아침. 평생 약을 먹어야 한다는 말에 나는 좌절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먹여야 한다는 말에 크나큰 족쇄를 달고 살아야 한다는 느낌이었다. 아이가 크면 잘 챙겨 먹을까. 미리부터 걱정을 했고 선천적이라는 말에 내가 죄인이 된 것 같았다. 혼자 잘 노는 아이를 옆에 두고 나는 아파트 창문만 바라보았다. 뭐를 해도 신나지 않았고 먹고 싶은 것도 없었다. 남편은 산후 우울증 같다고 했다. 병원을 가보자고 했지만, 큰아이를 돌봐야 하고  둘째에게 모유를 먹여야 하는 상황이라 병원에는 갈 수 없었다. 그렇다고 가만있을 수만도 없었다.      


  두 달에 한 번씩 대학병원에 갔다. 같은 질환을 앓고 있는 아이들이 전국에서 몰려와 병원은 북새통을 이루었다. 한 시간을 넘게 기다리다 검사하고 2분도 안 되는 짧은 진료를 받고 약을 탔다. 그 조그마한 아이에게 주사 바늘이 꽂히는 것을 두 눈 크게 뜨고 지켜봐야 했다. 아이는 울지도 않고 의젓하게 참아냈다. 약은 가루약이었고 모유를 피해 따로 물에 개어 먹여야 했다. 약만 챙겨 먹으면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말에 기대며 체념했다. 시간이 약이었다. 병원에서 운영하는 갑상선기능저하 환아모임과 인터넷 카페에 들어가 사연을 나누고 정보를 교환하면서 조금씩 받아들였다. 그리고 보건소에서 치료비 지원을 해 준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갑상선기능저하증은 갑상선 자체에 문제가 생겨서 갑상선호르몬의 생산이 감소하거나, 갑상선호르몬의 분비를 자극하는 갑상선자극호르몬(TSH)의 생산이 감소함으로써 갑상선호르몬을 충분히 만들지 못하여 나타난다고 한다.(출처-아산병원 질환백과) 대학병원에서 우리 둘째는 후자로 갑상선 자체는 정상으로 보인다고 했다. 세 돌이 지나서 종합적으로 갑상선 검사를 다시 해보자고도. 혹시나 약을 뗄 수도 있다는 가느다란 희망을 시사했었다. 


  남편이 1년 동안 미국 파견근무를 마치고 유학을 가겠다고 나섰다. 둘째 걱정이 가장 먼저 들었다. 세 돌이 된 시점이라 희망을 품고 미국으로 떠나기 전, 검사를 진행했다. 2주? 3주? 갑상선 약을 중단했다. 갑상선이 기능을 하는지 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반응하지 않았다. 약을 먹는 동안에 갑상선 호르몬이 나올 수도 있나요? 나는 몹시 궁금했다. 하지만 약을 먹으면 굳이 몸에서 호르몬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설명이었다. ‘그러면 약을 더 떼 봐야 되지 않나요?’ 물어보지도 못하고 짧은 진료가 끝나버렸다. 급성장기 아이에게 섣불리 약을 뗐다가는 지능저하 등 심각한 부작용이 생길지 모른다. 대학병원의 교수님은 꽤 신중한 태도였다. 일단,  1년 치 약을 처방받아 미국으로 떠났다.    

  

  둘째에게 6개월 동안 약을 잘 챙겨 먹였다. 그런데 나머지 6개월 분 약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민 가방 10개의 짐이 빤한데도 약은 보이지 않았다. 한국에 연락해서 다시 약을 처방받아 국제 우편으로 보낼 시간이 없었다. 어차피 5년은 있어야 하니 미국에서 병원 처방을 받는 게 낫겠다 싶었다. 남편은 좀 더 큰 어린이병원을 검색해 아이를 데려갔다. 나는 집에서 두 아이와 기다려야 했다. 대신 아이의 병력과 호르몬의 수치, 약의 용량 등 상세한 정보를 남편에게 자세히 말해 주었다.

  남편이 돌아왔다.      

  “약을 몇 주 동안 끊어보자던데?”

  남편이 말했다.

  “검사는?”

  “피검사 밖에 안 했어.” 

  그래도 되는 건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약을 먹는 동안에는 갑상선이 작동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자꾸 목에 걸려 넘아가질 않았기 때문에 기다려 보기로 했다. 내가 의사와 직접 대면하지 못한 것이 못내 답답했지만 할 수 없었다.    


  우리는 메릴랜드 대학교의 학생 보험에 가입되어 있었다. 내는 보험료에 따라 코페이(co-pay: 갈 때마다 내는 본인부담금)가 정해지는데 우리는 갈 때마다 15달러 정도 부담을 한 것 같다. 그리고 병원은 보험사에서 정해준 몇 개의 선택지에서 고를 수 있다. 자주 가는 소아과는 한국인 의사가 있어서 선택했다. 가고 싶은 병원이 있으면 검색해 본인 보험이 커버가 되는지 확인해 보고 갈 수도 있는 거다.  

  

  4주쯤 약을 뗐나? 갑상선 호르몬 수치가 미세하게 보인다는 결과가 나왔다. 전혀 생산하지 않던 갑상선이 드디어 작동을 시작한 건가. 의사는 2주 정도 약을 더 떼 보자고 했다. 기대 반 걱정 반으로 2주를 보냈다.   

   

  “갑상선 수치가 정상입니다!”      


  눈물이 났다. 둘째는 스스로 애써 고군분투를 하고 있었나 보다. 그렇게 우리 둘째는 선천성 갑상선 기능저하에서 벗어났다. 모든 아이가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 정밀검사를 했을 때 둘째의 갑상선은 정상인데 작동을 하지 않는 케이스라고 했다.  6개월 분 약을 찾지 못한 것이 평생 짊어지고 갈 굴레를 벗어던진 계기가 되다니. 인생은 참 모르겠다. 전화위복. 상투적인 말을 쓰고 싶지 않지만,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6개월 분 약은 몇 달 뒤, 싱크대 상부장 깊숙한 곳에서 발견되었다.)


  프리킨더, 킨더가든, 1학년, 2학년. 둘째는 4년 동안 미국학교를 다녔다. 학교에서는 2년 동안 ESL수업을 통해 부모가 쓰지 않는 영어의 구멍을 메꿔 주었단다. 나는 그런 줄도 몰랐다. ESL 종강 파티에 참석하라는 가정통신문을 받고 알았다. 둘째가 ESL 수료증을 받으며 눈물 흘리는 제스처를 취하자 아이들이 웃겨서 모두 뒤로 넘어간다. 한국말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고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못 했을 때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생활을 아주 잘 해준 우리 아들이 자랑스러웠다. 

  둘째는 학교에서 주는 칭찬 스티커를 모아 손바닥만 한 동물인형들을 사 왔다. 스쿨스토어란다. 칭찬스티커는 일종의 돈이다. 무엇이든 잘하면 받는.  규칙을 잘 지키고 마음이 따뜻한 둘째는 아직도 그 동물친구들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수업시간 선생님과 학교 복도를 이동할 때, 아이들은 한 손은 허리에 붙이고 다른 한 손은 입에 쉿 하는 자세로 줄을 서서 걷는다.  아직도 그때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둘째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지금도 혼자서 모든 걸 다한다. 학교도 걸어 다니고 먼 거리의 학원도 자전거로 다닌다. 무거운 가방이 어깨를 눌러도 거기다 기타까지 메고 걸어 다닌다.(형은 3년 내내 태워다 줌) 운동을 잘하고 노래와 음악을 사랑한다. 


  입시를 앞두고 내 걱정은 태산이다. 그러나 뭐든지 혼자 하겠다고 하는 둘째를 나는 또 믿고 기다려야 하는 거라고 애써 스스로를 다독인다.   

           


#갑상선 기능저하증   #ESL수업   #스쿨스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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