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핼러윈과 스토리북 퍼레이드
도서관으로 가는 길은 두 개였다.
바쁜 아침 스토리타임 티켓을 얻으려면 도로 쪽 길로 빠르게 걸어야 한다. 막내 유아차를 뒤로 완전히 젖혀 아들 둘을 태웠다. 비탈길은 천천히 오르고 내리막 길은 신나게 달렸다.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2층짜리 아파트들이 블록처럼 길게 누워있고 잘 가꾸어진 정원수에서는 여름 꽃향기가 날아다녔다. 뭔가를 향해 달려가는 발걸음은 빠르고 씩씩했다.
또 다른 길은 아파트 입구에서 숲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아름드리나무들이 빽빽하게 숲을 이루는 길 속으로 들어가면 그림처럼 아름다운 호수가 나온다. Greenbelt Lake! 호수를 한 바퀴 돌면 30분쯤 걸렸다. 속도에 따라 다르지만 나는 그랬다. 아이들과 함께 걸으면 1시간이고 2시간이고 주변을 둘러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넓고 그윽한 호수 주변에는 단정한 잔디밭이 펼쳐지고 무더기무더기 이름 모를 꽃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우리는 칩멍크(chipmunk, 얼룩 다람쥐)와 로빈, 카디날(새)이 그루터기에 놓인 먹이를 먹는 모습에 흠뻑 빠져 있기도 했고 가끔 비버도 만났다. 주말이면 늘 그곳으로 가 시간을 보냈다. 느긋하고 잔잔한 호수와 숲을 바라보며 길을 걷다가 발길은 언제나 도서관 쪽으로 향했다.
8월 말쯤으로 기억한다. 숲을 벗어나가도 전에 요란한 소리들이 둥둥거렸다. 마술피리 소리처럼 우리를 강하게 당겼다.
도서관 일대의 넓은 공간이 놀이공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며칠 전에도 없던 회전목마와 바이킹, 자이로드롭, 나는 로켓과 그네, 다람쥐 통, 청룡열차, 긴 미끄럼틀이 생겼다. 엄청난 크기의 놀이공원이 하룻밤 사이에 뿅 하고 나타난 것이다. 설치하는 장면을 보지 못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만화 속 지니가 나와 옮겨 놓은 궁전 안에 들어온 느낌이었다고 할까.
우리도 줄을 서고 종이티켓을 샀다. 처음에는 영문도 모르고 그냥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바이킹과 나는 그네 등 놀이공원의 난이도가 예사롭지 않았다. 아이들용이 아니었다. 큰아이는 다섯 살이 되었다고 제법 용기를 내어 놀이기구를 탔다. 둘째와 막내는 기다란 미끄럼틀 위에서 바람을 가르며 내려오고 회전목마에 올라 함박웃음을 지었다. 아기용 청룡열차를 타며 잠시 날아오르는 기분을 맛보았을 것이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오토바이와 자동차 위에서 “부릉부릉~ 부릉부릉~” 아이들이 말풍선을 불어 댔다.
놀이기구들 옆에 헌 책들이 펼쳐져 있었다. 50센트나 1달러면 살 수 있었다. 학교에서 교재로 쓰는 읽기용 얇은 책, 개인이 기부한 책들이다. 헌 책을 팔아 학교 기금을 마련한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나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책과 읽기용 얇은 책을 몇 권 샀다. 겨우 몇 달러에.
한쪽에서는 갖가지 먹거리들이 달콤한 냄새로 유혹했다. 참고 참다가 아이들에게 펀넬 케이크(Funnel Cake)를 하나 사 주었다. 슈가 파우더가 눈처럼 뿌려진. 꽈배기랑 비슷했지만, 조금 더 부드러웠다.
커뮤니티센터 건물 안에는 어른들과 아이들이 만든 그림과 사진, 만들기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흔히 볼 수 없는 독창적인 작품들과 아이들의 귀여운 작품들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거기에는 1등, 2등, 3등 리본이 달려 있었다. 축제 마지막 날에는 리본을 받은 수상자들을 위한 시상식을 했다.
그야말로 온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와 즐기는 축제였다.
8월 말부터 9월 초, 그린벨트 마을에서 열리는 노동절 축제다. 올해(2024년)로 70주년을 맞이했다. 유스 센터 건립을 위한 펀딩 모금을 위해 설립된 행사라고 한다. 작년 영상을 보니까 공연이 있고 아이들을 위한 각종 오프라인 게임과 놀이공원이 활짝 펼쳐졌다. 밤늦도록 즐기는 마을 축제가 몹시도 그리워진다. 메릴랜드에서 가장 크게 자원봉사자들이 동원되는 축제라는 건 지금 알았다.
온 마을과 학교, 커뮤니티 모두가 하나 되어 뭉치고 있었다. 2002 월드컵으로 온 국민이 하나 되었던 그 느낌을 당시 그곳에서 받았다. 아름다웠다. 나도 그 마을 깊숙이 들어가 하나가 되고 싶을 만큼.
우리는 매년 노동절 축제 안으로 들어갔다.
그 마을에서 아이들을 키운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해를 거듭하고 아이들이 자라면서 우리도 작품을 냈다. 학교에서 그리거나 만든 작품도 좋고 집에서 혼자 만든 것도 좋았다. 프리킨더를 다니던 막내는 바닷속을 콜라주로 표현한 작품을, 드래건 애니메이션을 좋아했던 둘째는 드래건을 세밀하게 그린 그림을, 첫째는 박스를 오리고 색종이로 붙인 DSLR 카메라를, 나는 나비를 그려 출품했다. 둘째는 노란색 리본을, 첫째는 붉은색 리본(2등)을 받았다.
상의 자리를 나누긴 했지만 상품은 똑같다. 1등이 제일 신나겠지만, 모두 수고했다는 의미로 같은 크기의 선물을 나눠주는 것에, 나는 감동했다. 무대에 올라가 상을 받는 장면이 지역신문에도 실렸다. 마을의 축제는 관광객을 유치하거나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마음을 한 대 모아 그야말로 함께 즐기고 노는 것이라는 느낌에 내 마음은 더 풍요로워졌고 그 마을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
찬바람이 불고 가을이 물씬 풍기던 아침이었다. 스쿨버스 스탑에서 일본인 친구 히사코가 오후부터 핼러윈 축제가 도서관 일대에서 펼쳐진다고 알려주었다. TV에서만 봤던 핼러윈 축제라니 놀랍기도 하면서 당황스러웠다. 한 번도 참여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까운 몰에 가서 아이들에게 맞는 핼러윈 의상을 구입하기로 했다. 호박의상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얇은 의상보다는 도톰해서 따뜻해 보였다. 호박의상은 둘째에게 입히기로 했다. 큰아이는 나사 우주복을, 막내에게는 드래건 의상을 골라 주었다. 막내에게 드래건 의상이 많이 컸다. 그 모습은 더없이 귀여웠다. 그런대로 의상을 갖춰 입고 우리는 도서관 앞으로 갔다.
온 동네 아이들이 다 모여 있었다. 백설 공주, 신데렐라, 우디 등 애니메이션 주인공들과 각종 동물들, 게임의 황제 마리오 의상 등 각양각색의 개성을 담은 의상들이 다 나왔다. 박스와 종이, 천을 뒤집어쓰고 아이디어를 한껏 뽐낸 작품들도 꽤 있었다. 종이 박스로 만든 대형 냉장고로 변신해 등장한 아이가 기억에 남는다.
그린벨트 온 마을이 밤을 기다리며 들썩들썩했다. 아이들 손에는 플라스틱 호박 통이 하나씩 들려 있었다.
피에로 아저씨가 높은 외발 자전거를 타고 나타났다. 외발 자전거 위에서 볼링 핀을 던지고 공을 돌리고 링을 던지고 받으며 멋진 공연을 펼쳤다. 아이들은 잔디밭에 모여 앉아 눈을 반짝이며 피에로 아저씨 공연을 우러러보고 있다. 피에로 아저씨는 아이들의 혼을 쏙 빼놓고 기대와 환호, 재미의 크기를 절정에 올려놓고 퇴장했다.
그리고 마이크를 든 사회자가 나타나 시상식을 열었다. 그해 가장 멋진 의상을 입고 나온 아이들을 호명했다. 코스튬 대회였다. 연령별로 가장 기발하고 훌륭한 의상을 입은 아이들에게 상을 주는 것이었다.
처음 참석한 우리 막내가 상을 받았다. 마트에서 산 드래건 의상이었지만, 돌이 막 지난 막내가 제 몸보다 큰 옷을 입고 뒤뚱거리며 걷는 것이 눈에 띄게 귀여웠나 보다. 처음 보는 새로운 얼굴이라 상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격하게 환영한다는 의미를 담아서 말이다. 10달러의 상금을 받았다. 정말 멋진 축제였다.
막내가 상을 받고 우리는 그곳에 사는 5년 동안 매해 핼러윈 축제에 참석했다.
그날 아이들은 생애 처음으로 “Trick or Treat!”을 외치며 호숫가 멋진 집들을 돌았다. 손에 든 비닐에 사탕과 과자가 가득 차도록 아이들을 지칠 줄 몰랐다. 그리고 우리 아파트도 돌아다녔다. 아이들은 자기 배보다 큰 사탕 가방에 행복했을 것이다. 우리 집 문을 두드리는 꼬마 손님들에게 나는 집에 있는 먹거리들을 내주었다. 내가 사탕을 주게 될 거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문 앞에 장식이 있는 집만 두드려야 한다)
첫해는 의상을 사서 입혔으나 나도 진화했다. 손바느질로 의상을 만들어 입혔다. 피터 팬, 늑대, 와일드 크렛 브라더스, 꽃과 나비 등. 특히 나비를 좋아하게 된 큰아들을 위해 나비를 모티브로 옷을 만들었다. 꽃은 펠트지를 이용해 손바느질로 옷을 만들었고 나비는 아들이 손수 그려서 색칠한 다음 테이프로 코팅했다. 꽃에 날아든 나비처럼 나비를 와이어 끝에 매달아 모자에 붙었다. 꽃모양 옷을 입고 모자를 쓰면 아들 스스로가 나비가 날아든 꽃이 되는 것이다. 그 옷을 입고 볼티모어 동물원에서 코스튬 대회에 참석했다. 뿌듯했다.
핼러윈 때 학교에서는 책과 연관된 의상을 준비해 입고 스토리북 퍼레이드를 했다. 막내가 프리 킨더에 다닐 때였다. 조기 입학으로 친구들보다 한 뼘이나 작은 막내를 위해 나는 The Very Hungry Caterpillar(배고픈 애벌레) 책의 애벌레 의상을 만들었다. 펠트지와 솜을 이용해 손바느질로 한 땀 한 땀 만들었다. 퍼레이드 때 나도 학교에 가 아이들 사진을 찍어 주었다. 어찌나 귀여운지 그때의 모습이 마음속에 사진처럼 남았다.
만들기를 좋아하는 내게 코스튬 의상은 취미이고 도전이며 재미였다. 아이들을 키우는 재미는 꽤 쏠쏠하다. 아이들이 나를 성장시킨다.
그해 연말 즈음, 김치를 담그기 위해 아파트 입구에서 마을 신문을 여러 장 들고 왔다. 배추를 다듬기 위해 신문을 펼치는 순간 정말 깜짝 놀랐다.
우리 막내가 애벌레 의상을 입고 퍼레이드 하는 장면이 그대로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연말에 마을 행사를 돌아보자는 코너에 실린 것이었다.
그날 김치를 담그지 않았다면, 신문을 가져오지 않았다면, 아직도 몰랐을 거다. 참 기막힌 타이밍이었다.
온 마을 사람들이 핼러윈이라는 축제를 위해 정원을 꾸미고 집을 장식한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동심을 채워주기 위해 사탕을 준비하고 아이들을 기다렸다. 아이들은 온 마을을 돌아다니며 사탕을 받고 신이 났다.
활짝 웃으며 즐거워하는 아이들을 보며 어른들도 행복했다.
미국에 간 첫 해에 이 축제를 알려준 친구 히사코에게 무척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