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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꼬 용미 Jul 09. 2024

결코 평범하지 않은 미국 생존기

14.우리 아이가 TAG라고요?

  

   큰아이는 미국 학교에 그럭저럭 잘 적응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TV를 잘 보지 않던 아이가 피터팬 DVD를 영어버전으로 보겠다고 TV 앞에 자주 엎드렸고 처음 듣거나 모르는 단어를 기억해 와서 묻곤 했었는데, 내가 영어사전을 펼쳐 철자와 의미를 알려주면 아이는 하루종일 그 단어를 중얼중얼거렸던 것 같다. 


  킨더가든 때는 매달 초에 한 달 치 숙제가 A4 한 장에 잘 정리되어 왔다. A로 시작하는 단어 3-5개 써오기, See 단어를 이용해 문장 2-3개 만들어오기, 본인 이름 3번 써오기 등 다양한 숙제 목록 중 그날그날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할 수 있었다. 숙제는 노트에 날짜를 적고 한 다음, 한 것은 색칠해 나가는 방식이었다. 결국, 한 달 동안 25개 넘는 과제를 모두 하게 되는 것이다. 매일 나는 옆에서 숙제를 봐주었다.   


  큰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숙제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매일 30분씩 책을 읽고 부모의 사인을 받는 것이었다. 토요일, 일요일도 빠짐없이 한 달 숙제 달력을 꼬박 채우면 피자 헛 쿠폰을 주었기 때문이다. 남자아이라 그런지 큰아이는 승부욕이 있었다. 매일매일 책을 읽었고 잊어버리고 자는 날에는 자다가 일어나 책을 읽고 사인을 받았다. 몇 달 동안 피자 쿠폰을 매달 받았다. 이때 읽기의 습관을 기르고 책의 재미를 확실히 알게 된 것 같다. 아마 그때 코스트코 피자 말고 다른 피자를 맛본 것은 그 쿠폰 덕이다.           


   또 학년이 올라가면서 아이의 수학숙제는 내가 영어 사전을 옆에 펼쳐 놓고 알려 주었다. 수학용어를 영어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몇 달 뒤에 선생님으로부터 뜻밖의 쪽지를 받았다. 숙제는 아이 혼자 하게 하고 맞았는지 확인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다음부터 나는 아이 숙제에서 해방되었다.  

         

   영어를 잘하는 남편이 있어도 소용이 없었다. 남편은 자기 공부와 일을 하느라 바빴고 아이들 교육에서 매번 한 걸음 물러나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지침을 주었다. 집에서는 한국말을 쓸 것!  어설픈 영어를 쓰지 말 것! 이것만큼은 단호했다. 


  미국에 자리 잡은 남편 선배들이나 이민자들의 2세가 한국말을 잊어버리고 영어만 사용하면서 부모들과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는 한국어를 잊지 않기 위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해 보였다. 그래서 나는 집에서 한국어로 놀아주고 한글을 가르쳤고 한글 책을 읽어 주었다. 그건 영어를 잘 못하는 내게 아주 쉬운 일이었다. 


우리 아이가 TAG라고요?

  

  어느 날, 큰아이가 학교에서 가정통신문을 받아왔다. 우리 아이가 ‘Talented And Gifted ’ 학생이라고 쓰여 있었다.  

   "TAG가 뭐지?"

 영어사전을 찾아보니 TAG는 영재였다. 가정통신문에는 워싱턴 D.C. 에 있는 학교로 갈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은 매일 고속도로를 타고 20분 데려다주고 다시 데리고 와야 한다는 의미였다. 내가 운전면허를 따기 전이었고  남편도 자기 학교에 가야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도 없이 불가능이었다. 재고의 여지나 아쉬워할 겨를도 없었다. 

          

   남편 공부 때문에 나온 것이라고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았다.        

   

  TAG에 관해 잘 알아보지도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나는 무식한 건지 무심한 건지…. 그때 내가 운전을 할 줄 알아서 큰아이가 영재학교 수업을 받았다면 어땠을까. 가끔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래도 큰아이가 한 번도 그때를 후회한다거나 아쉬워하지 않아 다행스러울 뿐이다. 학교에서는 TAG학생들을 모아 가끔 따로 수업을 진행해 주었다.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일반 학교수업도 그룹별로 수준에 따라 약간씩 달랐다. 큰아이는 레베카와 빈센트랑 셋이서 늘 한 그룹을 이루었다. 다른 아이들보다 좀 더 높은 수준의 공부를 했다고 들었다. 심화 문제를 풀게 하거나 진도가 약간 빨랐던 것으로 안다. 아이는 자연스레 레베카와 빈센트랑 친해졌다. 레베카가 추천해 준 책을 참 잘 읽었고 교육적인 게임 사이트도 추천받으며 서로 잘 지냈던 것 같다. 그때 큰아이가 읽었던 책들을 요즘 도서관에 만나면 무척 반갑다. 

  

  한 번은 참관수업에 간 적이 있다. 선생님은 곱셈구구 채점을 레베카 엄마와 내게 해달라고 맡겼다. 우리는 구구단이 있어 곱셈 채점은 식은 죽 먹기였다. 레베카 엄마가 놀랄 정도로 내가 더 빨랐다. 별거 아니지만 내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나는 참관 수업 때마다 꼭 학교에 가서 학부형들을 만나거나 아이들이 어떻게 교육받는지 지켜보았다. 


  마지막 수업에 아이들이 모두 책상 위에 올라앉았다. 선생님은 단어의 뜻을 설명하고 아이들은 스펠링을 하나씩 말했다. 틀리면 의자에 내려앉았다. 스무 명이 넘는 아이 중 최종 세 명에 큰아이가 들었다. 게임은 계속되었다. 선생님은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의 뜻을 말했다. 빠르게 알파벳 철자들이 오고 갔다. 마지막에 우리 아이가 주먹을 불끈 쥐고 "Yes!" 한다. 이겼단다. 원어민들을 사이에서 외국인이 영어 철자 맞추기에서 최후의 1인이 된 것이었다.  

   

  "아들, 아까 무슨 단어였니?"  

  “나도 처음 듣는 단어였어.” 

 큰아이는 알던 단어도 아니었다고 했다. 힌트를 듣고 유추를 했다는 건지, 발음을 듣고 알았다는 건지, 난 뭐가 뭔지 잘 몰랐고 그저 놀라웠다. 나 혼자 속으로 뿌듯했을 뿐이다. 한국에 돌아오기 직전, 초등 4학년을 마칠 때쯤 큰아이의 언어능력이 7학년 수준이라는 평가 보고서를 받았다. 


  큰아이는 한글을 완전히 떼고 받아쓰기가 가능할 때쯤 영어를 접했다. 그래서 언어 습득이 좋은 게 아닐까. 나 혼자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그리고 새로 배운 단어를 곧바로, 여러 번 중얼거리다 꼭 한 번은 써먹는 시도! 그것이 팁이 아닐까?  둘째와 셋째는 한글을 떼기 전, 더 어릴 때, 영어를 접한 탓에 많이 헤맸다. 영어도 한국어도. 지금까지도.    


   한국에 돌아왔을 때 삼 형제는 저희들끼리 영어를 사용했다. 주위에서 들리는 한국말을 의식해 영어로 말하는 것을 감추더니 영어는 곧 사라졌다. 거의 6개월 만에. 그리고 한국 학교에 잘 적응했다. 엄마가 영어를 못하는 것이 장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영어는 아이들에게 그저 언어였던 것 같다. 그곳에서 살아가기 위해 생존 언어 말이다. 아빠의 유학이 모든 아이들에게 유익했던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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