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국이 싫어서>
한국이 헬조선이라고 불리는 이유, 많은 한국인들이 자살하고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표준에 대한 믿음 때문이 아닐까. 많은 사람들이 특정한 삶의 경로를 따르면 행복해지리라고, 반대로 그 표준적인 경로에서 이탈하면 불행해지리라고 믿는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명문대에 입학하고, 대기업이나 전문직에 취직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단란한 가정을 이뤄야, 진정한 행복에 다다를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 다른 형태로 행복한 삶에 대해서는 좀처럼 상상하지 못하는 듯하다. 그만큼 좁은 경로의 길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다른 사람과 경쟁하고, 표준적인 삶과 거리가 너무 멀지는 않은지 남들과 끝없이 비교한다.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표준적인 삶의 경로와 그 길에서 행복이 주어지리라는 믿음은 계나 어머니의 대사에서 도 확인할 수 있다. 계나가 어머니와 함께 멸치를 손질하는 장면에서 어머니는 열심히 노력하면 보상은 반드시 찾아온다며 계나에게 지명과의 결혼을 종용한다. 남의 눈치 보지 않고 본인이 원하는 대로 살아본 적 있느냐는 계나의 질문엔 본인의 행복은 그저 가족이 건강하게 잘 사는 것뿐이라고 답하기도 한다. 그녀는 계나가 평범한 행복을 누리길 바라는 마음에 행복이 보장됐다고 믿는 결혼과 출산을 거듭 권유하는 것일 테다. 또한 본인의 행복은 계나가 표준적인 삶의 형태를 '완성'하는 것에 달려있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미 계나는 '이렇게 살아야 행복할 거야'라고 통용되는 사회적 믿음에 나름대로 부합하는 사람이다. 홍익대라는 좋은 학벌의 대학을 졸업했고, 번듯한 금융 회사 IT 부서에 재직 중이고, 결혼 상대로서나 인간적으로나 괜찮은 애인이 있으며, 그 애인은 계나와의 결혼을 생각하고 있다. 일반적인 한국인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표준적인 삶의 형태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나는 행복하지 않다. 출근길에는 덜컹거리는 버스에서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부족한 잠을 청한다. 지친 하루를 끝내고 집에 돌아와서는 입김이 피어오르는 방 안에 누워 이불로 몸을 싸맨다. 행복은커녕 여전한 피로와 추위에서 벗어나지 못한 계나는 한국을 떠나기로 결정한다. 다른 국가로 떠나는 계나의 행위는 표준적인 삶의 경로를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그 경로에서 이탈하는 것이다. 약속된 행복이 보장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불행하기 때문에.
그래선지 한국이 싫어서 뉴질랜드로 떠난 계나의 선택은 현대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이기 이전에 표준적인 행복의 경로에서 이탈하는 과정으로 이해됐다. 한국인들이 상상하는 표준적인 삶의 형태에는 한국이라는 공간적 배경이 대전제로 깔려있을 것이다. 본인의 성공한 미래를 떠올리라 한다면,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자연스럽게 한국에서의 삶을 떠올리지 않을까? 사람들이 꿈꾸는 좋은 대학을 구체화해 본다면 SKY로 일컬어지는 한국의 명문대일 것이고, 번듯한 직장은 삼성과 같은 대기업일 것이다. 결혼한 모습을 떠올려보라 한다면, 대부분 외국인 배우자보다 같은 국적의 한국인 배우자를 떠올릴 것이다. 한국에서 기대되는 표준을 성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약속대로 행복을 보상받지 못한 계나는 더 표준적인 삶의 형태를 좇거나 주어진 불행한 삶에 순응하 지 않는다. 아예 다른 국가를 선택함으로써, 적극적으로 표준에서 이탈함으로써, 새로운 행복을 찾는다.
뉴질랜드는 마냥 한국에서의 불행이 제거된 공간이 아니다. 낭만적인 행복으로 가득 찬 공간이 아니다. 계나는 뉴질랜드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고된 노동을 하고 , 국가에 머무를 권리를 획득하기 위해 불안감 속에서 고군분투한다. 한국과는 다른 종류의 위계와 차별이 존재하며(리키의 말마따나 서양인은 외모로 아시안인들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세부 인종에 따른 아시아인 위계 구분은 덜하겠지만, 영어를 잘 구사하느냐 여부에 따른 차별은 여전히 존재한다), 하준의 아버지 같은 누군가에게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지루한 공간이기도 하다. 계나는 그토록 싫어하던 한국을 떠났다는 이유로 뉴질랜드에서 손쉽게 행복을 얻지 않는다. 뉴질랜드에서 계나는 많은 날을 울었다.
하지만 또 그만큼 많은 날을 웃었다. 한국에서의 계나의 표정은 무표정하거나, 화나있거나, 무언갈 참고 있는 표정이었다면, 뉴질랜드에선 비록 우는 날이 있었어도 행복하게 웃음 짓는 날도 많았다. 힘든 일이 생기면 울음을 터뜨리는 뉴질랜드에서의 표정보다, 늦은 밤 아버지와 술잔을 기울이며 울음을 참는 한국에서의 표정이, 내게는 더 불행해 보였다.
계나가 뉴질랜드에서 행복할 수 있었던 건 뉴질랜드에서는 다른 사람의 눈치를 살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다시 말해 뉴질랜드에서는 표준에 대한 의식이 심하지 않다. 뉴질랜드에서는 여태까지 해왔던 대로 점수를 조작해서 협력 업체를 선정하자는 상사의 말을 들을 필요 없다. 24평 아파트로 이사 가고 싶다고 적금을 깨 보태달라는 부모님의 노후를 하루하루 걱정할 필요 없다. 바람직한 직원, 바람직한 가족 구성원의 역할을 벗어나, 그에 기대되는 삶의 형태나 경로를 의식하지 않고, 뉴질랜드로 정착하고자 하는 본인의 삶에만 충실하면 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학교를 그만둘지 고민하는 재인에게 살고 싶은 대로 살라는 조언까지도 건넬 수 있게 된 게 아닐까.
행복이 표준적인 삶을 따를 때 주어지는 것으로 상상된다면, 그런 삶의 궤도에 안정적으로 들어서지 못한 삶은 행복하지 못하리라는 믿음으로 이어진다. 미래에 대한 행복이 부재할 것이라면 결국은 지금 죽어도 상관없다는, 지금 죽어야겠다는 결론에 이를 수도 있다. (정확한 사인은 등장하지 않지만 추정상) 장기간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것을 비관해 자살한 경윤처럼 말이다.
계나의 꿈속에서 계나와 경윤이 나눈 대화가 조금만 더 일찍 이루어졌다면 어떻게 됐을까. 계나의 말처럼 실은 삶에는 여러 경로가 존재한다는 것을, 그 길에서도 충분한 행복이 얻어질 수 있다는 것을 경윤이 알았더라면 말이다. 행복에 이르는 경로는 유일하다는 믿음 때문에 경윤은 행복을 과대평가했고, 그 행복에 이르는 유일한 경로를 걷지 못하리라는 불안 때문에 삶을 포기했다.
행복을 과대평가하지 않을 때, 그 표준적인 삶의 경로에서 이탈할 용기를 얻을 수 있다. 반대로 그 표준적인 삶의 경로에서 벗어나도 괜찮다는 걸 눈 딱 감고 경험한다면, 행복에 대한 과대평가를 과감히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반드시 보상이 주어지리라는 어머니의 말에 '올지도 안 올지도 모르는 보상을 기다리느라 괴롭기 싫다'라고 답했던 계나처럼, 이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걸어왔던 길이 여전히 불행하다면, 이제는 그 길에서 벗어날 용기를 내야 하는 게 아닐까.
*사라 아메드의 『행복의 약속』이란 책을 많이 떠올렸다. 이 책의 내용을 많이 참고해서 적은 글이다.
**한편으로는 계나가 표준적인 삶의 경로를 따르면서도 행복을 느끼지 못한 유일한 이유가 그녀의 경제적 계층인 것처럼 그려지는 건 아쉬운 부분이기도 했다. 계나의 집이 조금만 더 따뜻했다면 그녀는 뉴질랜드행을 택했을까? 한국에서의 삶이 불행해도 버티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결국 행복을 보장하는 핵심적인 삶의 조건으로 경제적 계층만을 강조하게 되는 건 아닐까? (물론 중요한 요소 중 하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