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옥
생일날 저녁에 딸아이가 봉투를 내밀었다. 그 속에 현금과 손 편지가 들어있었다. 무심한 듯 데면데면한 일상을 지내던 딸에게서 오랜만에 받아본 반가운 편지다. 살갑고 다정한 글에 코끝이 찡하다.
편지를 읽는 동안 방문 옆 작은 액자 속에서 초록색 옷을 입은 또 다른 글이 수줍은 듯이 내다본다. 딸이 고2 때 써준 생일축하 편지다. 우연히 찾아낸 이 편지를 보고는 다시는 이런 편지를 못 받아볼 것 같아서, 보물처럼 액자 속에 넣어서 걸어두었다.
요즘은 우편함을 열어보면 가끔 우표 없는 편지들이 들어있다. 그래 봐야 카드사에서 온 청구서거나 보험회사나 증권사의 안내문이 대부분이다.
예전에는 편지에 소식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움도 있고 반가움도 있고 아픔도 있었다. 우체국을 통해서 편지를 전달해 주는 사람을 우체부, 집배원, 배달부 등 다양하게 부르지만 내 고향에서는 배달부라고 불렀다. 그가 커다란 고동색 가방을 자전거에 싣고 딸랑딸랑 소리를 내면서 마을 어귀로 들어서면 들에서 일하던 사람들도 허리를 펴고 일어서서 물어본다.
“어이 배달부, 우리 편지 있는가?”
“아저씨, 우리 집에 편지 왔어요?”
때로는 배달부가 먼저 논밭을 향해 소리쳐 부르기도 한다. 그럴 땐 전보나 등기가 왔을 때다. 그는 마을 대부분 사람을 아는 것은 물론이고 그들의 논밭 위치까지도 알고 있었다.
배달부는 늘 어른이건 아이이건 할 것 없이 사람 좋은 미소로 인사를 했고 동네 사람들은 친숙한 그를 좋아했다. 특히나 아들을 군에 보낸 부모님, 애인의 사랑편지를 기다리는 젊은 청춘들, 머나먼 이국에 돈 벌러 간 손자의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는 할머니, 간절한 마음으로 합격 소식을 기다리는 사람들까지 배달부는 모두에게 가슴 설레는 기다림이었다.
나의 외 고모할머니께선 하나뿐인 부모 없는 외손자가 중동으로 일하러 간 후로 사립문이 아닌 동네 어귀에 나와서 배달부를 기다렸다.
어쩌다 손주한테서 편지라도 오면 작은 몸집에 꼬부라진 허리를 하고선 나에게로 오신다. 내가 그 편지를 읽어주면, 눈가 주름 사이에서 눈물을 찍어내시면서 잘 있다고 하느냐며 묻고 또 물어보셨다. 그리고 다음 날 편지지와 봉투를 들고 와선 답장을 써 달고 하셨다. 남의 손을 빌리지만 한 번도 답장하지 않을 때가 없었다. 그 편지 속엔 내가 다 헤아리지 못한 그리움과 보고 싶음 아픔까지도 녹아있었으리라.
나도 사랑하는 사람이 군에 있던 기간 동안 참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행여 나보다 먼저 부모님이 그 편지를 받을까 봐 마음을 졸이면서 배달부가 오는 시간을 계산하고 기다리며 애를 태우기도 했었다. 그 편지들이 그땐 얼마나 소중하던지 번호를 새겨가면서 모으고 간직했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새로운 집으로 이사했을 때였다. 이삿짐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어디선가 또랑또랑한 사랑의 노랫말이 들려왔다.
“보고 싶은 그대…….”
이 층 올라가는 계단에 앉아서 초등학생이던 딸아이가 나의 연애편지 보따리를 펼쳐놓고 신명 나게 읽는 중이었다.
그때 딸에게 꽥 소리를 지르며 몹시 민망해하던 남편의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 후론 가끔 출장을 가서 교육 강사들이 시켜서 의무적으로 보내던 편지마저 받아볼 수가 없었다.
대신 어린 딸들의 고사리 같은 손으로 써주던 사랑편지를 가끔 받게 되었다. 연애편지보다 더 감동을 주던 그 편지들도 아이들이 대학을 가고 나서는 거의 받아볼 수가 없었다.
이메일과 핸드폰의 문자나 카카오톡 때문에 손 편지를 주고받는 것은 특별한 일이 되어버렸다.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손주 편지를 기다리던 할머니도, 아직도 자전거 소리 딸랑딸랑하면서 편지요! 할 것 같은 그 배달부 아저씨도, 편지로 정을 나누던 나의 소중한 사람마저도 다시는 올 수 없는 먼 곳으로 떠나고 없다.
이제 나는 우표 붙은 손 편지 한 장 올 곳도 없고 사랑의 편지 같은 것은 더더욱 올 리가 만무한데 오늘도 철컹철컹 소리 내는 우편함 뚜껑을 열어본다. 왠지 나비 우표 붙은 가슴 설레는 편지 한 통이 들어있을 것만 같아서.
글쓰기가 멈춤 상태에서 잘 나아가질 못해서 추억이 묻어있는 예전글 올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