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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옥 Mar 09. 2024

산수유 꽃이 피면

 


  절대로 봄이 오지 않을 것 같은 날씨였다. 그런데 어느새 바람이 부드러워지고 코끝을 스치는 공기가 따뜻하다.

  그냥 만나면 반갑고 헤어지면 그리운 사람들이 있었다. 오래전 불교 카페를 통해 인연을 맺어온 분들이다. 나이도 성별도 사는 곳도 다 다르지만 일 년에 한두 번은 함께 산사를 찾아가서 기도했다. 카페를 통해 안부를 묻고 경전 공부도 함께 했었는데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 

  그러다가 지난겨울 어렵게 만나서 옛이야기를 나누었다. 헤어지면서 못내 아쉬워서 산수유 꽃이 피면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다. 언제 꽃이 피려나? 노오란 산수유 꽃이 언제 피어나려나? 기다리고 기다렸다. 벗도, 꽃도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삼월이 되니 산수유 꽃 축제 소식이 들려왔다. 서둘러 만날 날을 정 하고 기차표를 예매하고선 약속한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드디어 그날이 와서 기차에 올랐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산야는 아직 푸르름을 띄지는 않았다. 안개처럼 뿌연 빛으로 감싸인 나무들이 연둣빛을 만들어 내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것 같아 보였다. 

  구례구역에 내리니 역사驛舍앞 화강암에는 역 이름에 대한 유래가 새겨져 있었다. 사실 표를 예매할 때부터 왜 구례역이 아니고 구례구역이지? 하는 생각이 들었던 터라 유심히 읽어보았다. 지역은 순천이지만 구례로 가는 입구라 구례구求禮口 역이라고 한다고 새겨져 있다.

  일행을 기다리는 짧은 시간에 대형관광버스들이 수차례 와서 승객들을 내려놓는 것을 보았다. 크지 않는 시골 역은 금세 북새통을 이루었다. 도대체 저 많은 사람이 여기서 기차를 다 탈 수 있을까? 괜한 걱정이 들기도 했다. 경기가 어렵다는 말은 왠지 거짓말 같다. 잠시 기차가 머물다 가고 나니 그 많던 사람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다시 역은 정적에 쌓였다. 훈훈한 남녘의 공기가 역 안을 한 바퀴 쓰윽 돌고 나갔다.


  잠시 후 구례에 사는 지인이 차를 가져왔다. 참 따듯한 사람이다. 그 예전에도 구례에서 선뜻 자리를 마련해 준 구례 지기는 그때 우리를 집으로 초대하고 맛있는 밥상과 잠자리를 준비해 주었다. 모두 처음 본다는 어색함은 그의 친절함에 사라지고 같은 종교란 이유만으로도 오랜 지기처럼 이야기꽃을 피우며 화엄사며 천은사, 사성암 등을 순례했던 기억이 새롭다. 

  차를 타고 산수유 꽃 축제가 열리는 산동마을로 향해 달리다 보니 초록 봄은 보이지 않지만, 연노랑 봄이 가로수 가지마다 수줍게 웃으며 매달려 있었다. 이곳 산수유는 지리산 자락에서 서시천 변을 중심으로 상위마을 하위마을 지리산 온천 랜드까지 이어져 있었다. 수백 년 전부터 피워온 이 꽃은 구례의 상징이기도 하다. 

  차는 거북이걸음을 한지 오래되었다. 겨우 예약한 숙소에 이르니 이미 땅거미가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호들갑 떨지 않는 그런 반가움으로 먼저 온 일행과 만나서 저녁을 먹었다. 임시 야시장을 구경하면서 먹음직스러운 바비큐를 막걸리 한잔과 또 먹었다. 그리곤 줄지어 앉아있는 관상쟁이한테 손금도 보고 곡예단의 쇼도 구경했다. 야시장 구경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오는데 밤하늘의 초롱초롱한 별들이 곧 지상으로 내려올 것같이 아름답게 빛났다. 우리들은 나란히 잠자리에 누워 도란도란 옛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쓸데없는 구업口業을 짓다가 잠들었다.

  편안한 꿀잠을 자고 나와 보니 도로는 이미 주차장이 되어있었다. 산수유 꽃보다 행사장 건물들과 현수막, 사람들과 차가 더 많아 보였다. 기대와는 달리 산수유 꽃은 샛노란 꽃잎을 방실거리는 것이 아니라 피곤함에 지친 듯 연노랑 빛을 띠고 힘들게 버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꽃이 더 아름다워 보이는 그런 축제였으면 하는 맘이 들었다. 그래도 좋은 벗들 만났으니 그냥 갈 수 없지, 고목에 핀 예쁜 꽃을 찾아서 저마다의 스마트폰으로 찰칵찰칵 추억을 담았다.     

  ‘영원한 사랑을 찾아서’

  산수유의 꽃말이다. 

  아주 오래전 그 사람과 구례에 왔던 적이 있었다. 처음 산수유 군락지를 봤을 때 그렇게 어여쁠 수가 없었다. 작은 시골 마을 언저리를 감싸듯이 군데군데 노란 병아리 빛을 하고서 우리를 반겨주던 그 정취가 참 좋았다. 그와 슬그머니 손잡고 함께 봤던 마을 앞 작은 폭포 주변에 소담스레 피어서 물빛이 더 좋아 보였던 그 산수유 꽃은 늘 내 마음에 담겨있었다. 

  구례에 다시 가면 그 사람도 그때 그 산수유 꽃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가 말없이 슬그머니 내 손을 잡아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곳은 옛 정취도 느낄 수 없었고 그 사람도 없다는 것을 가슴 깊이 담아야 했다. 그토록 영원한 사랑이라고 믿었던 그는 어디에도 없었다.

  일행과 헤어져 집으로 오는 길에 나는 생각했다. 지인들을 만나러 간 게 아니고 그 사람을 찾으러 갔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 이제 산수유 꽃이 피길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그를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것을 깜박깜박 잊어버리는 내가 너무 가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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