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의식의 기원에 대하여
우리는 그 안의 존재가 ‘나’임을 안다.
눈가의 주름, 붓기, 낯선 머리카락의 방향조차 나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과연, ‘나’를 아는 능력은 인간만의 것일까?
거울 속 존재를 알아본다는 건, 어떤 인식의 경지일까?
놀랍게도, 이 질문에 ‘예’라고 답할 수 있는 생명체들이 있다.
심리학자 고든 갤럽은 1970년대, ‘거울 자가 인식 실험’을 고안했다.
침팬지의 이마에 몰래 붉은 얼룩을 묻혀두고, 거울 앞에 세운다.
거울 속의 얼룩을 본 침팬지가 자신의 이마를 만질 수 있다면?
그것은 거울 속 존재를 ‘자기 자신’으로 인식한다는 증거다.
이 단순한 실험은 이후 수십 년간 반복되며,
다양한 생명체들의 놀라운 자의식의 조각들을 발견하게 한다.
침팬지는 거울 앞에 서서 이마의 얼룩을 집요하게 만지며,
자신의 얼굴을 이리저리 들이대며 조사하듯 행동한다.
단순한 호기심이 아닌, 자기 대상화의 행동으로 보인다.
오랑우탄은 손거울을 붙잡고 얼굴을 이리저리 관찰하며,
털을 만지거나 입을 벌려보는 등 자기 외모에 대한 탐색을 보인다.
어린 개체보다는 나이가 든 개체가 더 높은 반응을 보인다.
코끼리는 커다란 전신거울 앞에서 코를 이용해
이마에 칠해진 얼룩을 직접 닦으려는 행동을 보인다.
자신이 비친 이미지를 공격하거나 무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높은 수준의 자가 인식을 시사한다.
돌고래는 수조 안에 설치된 거울을 향해 반복적으로 회전하며,
자신의 지느러미나 상처 부위를 자세히 관찰한다.
때로는 거울을 통해 새로운 움직임을 연출하듯 행동하는데,
이는 단순한 인식 너머의 ‘자기 표현’ 가능성도 암시한다.
까마귀과의 조류, 그 중에서도 특히 유럽어치는
머리에 붙은 스티커를 거울을 본 뒤 부리로 떼어내기도 한다.
기존에는 ‘거울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여겨졌던 조류에서도,
인지적 전환점이 존재한다는 단서가 발견된 것이다.
심지어 사람조차 생후 18개월이 지나기 전까지는 거울 속의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러나 이를 ‘느린 발달’이 아닌, 정교한 인식 구조가 필요한 복잡한 기능이라 본다면
오히려 자가 인식은 드문 능력이 아닌,
진화의 다양한 지점에서 다시 발견되는 능력일 수 있다.
자기 인식은 단지 거울 테스트의 성공 여부로 환원되지 않는다.
중요한 건 ‘자기 자신’이라는 개념이 존재하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바탕으로 감정을 구분하고, 부끄러움을 느끼며,
과거를 회상하거나 미래를 계획하는 ‘연속된 존재’로 자신을 경험한다.
그렇다면, 거울 속 자신을 알아본 돌고래는 자신의 감정을 아는 걸까?
이마의 얼룩을 인식한 까마귀는 창피함을 느낄까?
아직까지는 그 누구도 단정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자의식은 인간 고유의 특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진화의 관점에서 자의식은 반드시 필요한 능력이 아니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해도, 먹고 도망치고 번식하며 생존하는 생물은 수없이 많다.
그렇다면, 왜 어떤 생물은 ‘나’를 인식하기 시작했을까?
짝짓기와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해?
더 복잡한 전략과 기억을 구사하기 위해?
혹은, 그저 우연히 생겨난 인식 구조가
살아남는 데 유리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남아있을 뿐일 수도 있다.
거울을 통해 자기를 인식하는 존재를 우리는 영리하다고 부른다.
그러나 거울 없는 세계에서 살아가는 생명들에게
‘나’라는 개념은 처음부터 필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현재에만 존재하고, 지금 여기에 반응하며 살아간다.
부끄러움도, 후회도, 자기 검열도 없다.
오히려 ‘나’를 인식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끊임없이 분해하고,
의심하고, 판단하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자의식을 가짐으로써
단 한 번도 자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존재가 되었다.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기억 속의 나와 지금의 나를 끊임없이 비교하며,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를 끝없이 고민한다.
그 자의식은 우리를 사회적으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가장 복잡하고 피로한 생명으로 만들었다.
동물에게 자의식은 기능이지만, 인간에게 자의식은 질문이다.
삶을 더 낫게 만들기도 하지만,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거울 밖의 진짜 '나'도 거울 속의 나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