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설원에 발자국을 남기며 배우는 비움의 미학
완벽한 고요는 소음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마음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북해도의 겨울을 떠올리면 으레 삿포로의 화려한 눈축제나 오타루의 낭만적인 운하를 먼저 머릿속에 그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나는 이번 여정에서 그 익숙한 궤적을 벗어나 보기로 했다. 기차가 설원을 가르며 달릴수록 창밖의 풍경은 점점 단순해졌고, 역 이름조차 생소한 어느 소도시에 내렸을 때 마주한 것은 끝을 알 수 없는 순백의 침묵이었다.
유명 관광지의 들뜬 소란함 대신, 발밑에서 들려오는 눈 밟는 소리만이 유일한 리듬이 되어 나를 맞이했다. 화려한 장식도, 줄을 서야 하는 맛집도 없었지만 그곳에는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투명한 공기가 있었다.
소도시의 골목은 친절하지만 과하지 않았다. 낡은 역사의 난로 옆에서 김을 내뿜으며 마시는 캔커피 하나에 온기를 느끼고, 이름 모를 작은 식당의 주인장이 내어주는 투박한 덮밥 한 그릇에서 도시의 세련미보다 깊은 안심을 얻었다.
우리는 종종 더 많은 것을 보기 위해 여행을 떠나지만, 사실 더 적게 보기 위해 떠나야 할 때도 있다. 시야를 가득 채우던 광고판과 빌딩 숲이 사라지고 오직 하늘과 눈, 그리고 그 사이에 선 나 자신만이 남았을 때, 비로소 내가 어떤 온도의 사람인지 깨닫게 된다. 북해도의 소도시는 내게 화려한 볼거리를 주는 대신, 내면을 응시할 수 있는 여백을 선물해 주었다.
이곳의 겨울은 단순히 춥기만 한 계절이 아니라, 만물이 잠시 멈추어 스스로를 돌보는 정중한 시간이다. 지붕 위에 쌓인 눈의 무게를 묵묵히 견뎌내는 나무들처럼, 소도시의 사람들도 서두르지 않고 자신만의 계절을 살아가고 있었다.
나 역시 그들의 속도에 맞추어 걷다 보니, 무언가를 성취해야 한다는 강박이나 남보다 앞서가야 한다는 조바심이 눈 녹듯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삿포로라는 중심을 벗어나 변두리의 소박한 풍경 속으로 들어왔을 때, 여행은 비로소 일상의 연장이 아닌 진정한 의미의 '휴식'으로 치환되었다.
역으로 돌아가는 길, 뒤를 돌아보니 내가 남긴 발자국 위로 다시 고운 눈이 내려앉고 있었다. 소도시가 가르쳐준 것은 결국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예의'와 '남겨진 고요의 가치'였다. 화려한 불빛은 없어도 마음속엔 은은한 등불 하나가 켜진 듯한 기분으로 기차에 오른다.
북해도의 겨울은 여전히 시리고 깊지만, 그 깊이만큼 나의 내면도 조금은 단단해졌기를 바란다. 여행이 끝난 뒤에도 이 적막한 설원의 감각은 한동안 나를 지탱해 주는 힘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