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밤이 깊어질수록, 경주는 오히려 깨어나는 도시였다. 낮 동안 켜켜이 쌓아둔 침묵을 걷어내고, 천 년 전의 숨결을 조심스레 불러내는 시간. 해가 완전히 지고 나서야 이 도시의 진짜 얼굴이 드러난다는 사실을, 그날 밤에서야 알게 되었다.
연못 위에 비친 빛은 물결이 아니라 기억처럼 흔들렸다. 동궁과 월지에 들어서는 순간, 발걸음은 자연스레 느려졌다. 물 위에 떠 있는 것은 단지 건물의 그림자가 아니라, 오래된 왕조의 밤이었다. 달빛과 조명이 겹쳐진 풍경 앞에서 누구도 말을 잇지 못했다. 사진을 찍으려던 손마저 멈춘 채, 그저 바라보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연못은 일부러 전부를 보여주지 않는다. 몇 걸음 옮길 때마다 시선이 바뀌고, 그때마다 다른 장면이 열린다. 신라는 이렇게 밤을 설계했을까. 모든 것을 한눈에 주지 않음으로써, 오래 머물게 만드는 방식으로. 기다림조차 하나의 풍경이 되는 곳이었다.
월정교로 향하는 길에서 밤공기가 한층 차가워졌다. 다리 위에 켜진 불빛은 황금빛이었고, 그 빛은 남천 위에 또 하나의 다리를 만들고 있었다. 위와 아래가 서로를 비추는 장면 앞에서 시간의 감각이 흐려졌다. 이 다리를 건넜던 사람들, 사랑을 품고 걸었을 발자국들, 돌아오지 못했을 마음들까지 함께 떠오르는 밤이었다.
징검다리 한가운데서 바라본 월정교는 웅장했다기보다 묵직했다. 화려함보다는 오래 견뎌온 무게가 느껴졌다. 그 무게는 다리만의 것이 아니라, 이 도시가 품고 있는 시간의 총량 같았다.
조금 더 걸으면 첨성대가 모습을 드러낸다. 낮에는 조용한 돌탑이던 그것이, 밤에는 별을 대신해 빛을 품는다. 하늘을 읽던 탑 앞에서 우리는 이제 빛을 읽는다. 과거와 현재가 같은 자리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풍경은 묘하게도 낯설지 않았다.
첨성대를 지나 빛누리정원으로 들어서면, 경주는 또 다른 얼굴을 내민다. LED로 피어난 꽃들은 인공의 빛이었지만, 그 안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지극히 인간적이었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어색하지 않게 공존하는 순간, 이 도시는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사실을 조용히 증명해 보였다.
경주의 밤은 화려하다고 말하기엔 차분하고, 고요하다고 하기엔 너무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그래서 이 도시는 밤에 더 오래 걷게 된다. 불빛이 꺼진 뒤에도 기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돌아오는 길,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신라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밤이 되면 다시 나타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우리가 잠시 걸어 들어갈 수 있는 시간의 틈처럼. 그날의 경주는 그렇게, 오래 마음에 남았다.
불빛의 시간
사진보다 오래 남는 풍경에 대해, 조금 더 적어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