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하기 전, 이미 지쳐 있던 날에 대하여
여행을 떠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지쳐버린 날이 있었다.
공항 바닥에 캐리어를 세워두고 앉아 있을 때, 설렘보다 먼저 느껴진 건 묘한 피로였다. 아직 아무 데도 도착하지 않았는데, 이미 한 번 다녀온 사람처럼 몸이 무거웠다. 그날의 나는 여행이 아니라 이동을 견디러 가는 사람 같았다.
장거리 이동이 유난히 힘들었던 건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비행기에서 잠을 설쳤고, 어깨와 목은 굳어 있었으며, 도착한 도시의 첫 풍경을 제대로 기억하지도 못했다. 사진 속 나는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은 체력이 아닌 의지로 만든 표정이었다. 여행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지쳐버린다는 게 어떤 건지, 그때 처음 알았다.
이상하게도 우리는 여행지에서의 컨디션만 신경 쓴다. 어디를 갈지, 무엇을 먹을지, 얼마나 걸을지를 고민하면서 정작 그곳에 도착하기까지의 시간은 아무렇게나 흘려보낸다. 불편한 옷을 입고, 목이 마른 채로 버티고, 몸이 굳어가는 걸 참고 견딘다. 여행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면서.
하지만 몇 번의 여행이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여행의 피로는 대부분 그 길 위에서 이미 만들어진다는 걸. 이동 시간은 비어 있는 시간이 아니라, 여행의 첫 장면이라는 걸 말이다.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여행의 색이 달라진다.
그날 이후로 나는 이동 중의 나를 조금 다르게 대하기 시작했다. 편한 옷을 고르고, 물을 자주 마시고, 잠깐씩 몸을 움직였다. 대단한 변화는 아니었지만, 도착했을 때의 몸은 분명 달라져 있었다. 숙소 침대에 쓰러지지 않고, 창밖을 한 번 더 바라볼 여유가 생겼다. 여행의 첫날이 ‘회복’이 아니라 ‘시작’이 되었다.
이제는 안다. 여행을 잘 떠난다는 건, 나를 혹사시키지 않는다는 뜻이라는 걸. 이동을 견디는 사람이 아니라, 이동하는 시간마저 여행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는 것. 그 차이가 여행을 오래 기억하게 만든다.
다음 여행을 앞두고 있다면, 목적지보다 먼저 출발 시간을 떠올려보길 바란다. 그 길 위에서의 내가 어떤 상태이길 바라는지. 여행은 도착지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이미 공항 의자에 앉아 있는 그 순간부터, 천천히 시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