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와인투어, 한 잔보다 오래 남은 시간

와인은 취향이 아니라, 풍경으로 남았다

by 하루담음

포도밭을 처음 마주했을 때, 와인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잔에 담긴 맛보다 먼저,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모든 설명을 대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페인에서의 와인 투어는 생각보다 조용했다. 시끌벅적한 시음회나 취향을 증명해야 하는 자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라리오하의 흙은 붉었고, 포도나무는 질서 없이 늘어서 있었으며, 바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풍경 속에서 마신 와인은 ‘맛있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그날의 공기와 햇빛이 함께 입안에 남았다.


라리오하에서의 시간은 느렸다. 오래된 저장고의 차가운 공기, 나무통에 스며든 시간의 냄새, 그리고 말을 아끼는 사람들. 와인은 이곳에서 상품이 아니라 역사에 가까웠다. 한 모금 마실 때마다 설명보다 침묵이 더 어울리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반대로 페네데스는 밝았다. 바르셀로나에서 멀지 않은 곳, 햇빛이 먼저 와인을 깨우는 지역이었다. 기포가 가볍게 올라오는 잔을 들고 포도밭을 걷다 보니, 와인은 더 이상 어려운 대상이 아니었다. 특별한 이해 없이도 즐길 수 있는 순간들이 분명히 존재했다.


와인 투어를 하며 깨달은 건, 와인은 결국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기억의 문제라는 사실이었다. 어떤 날, 어떤 풍경 속에서 마셨는지가 더 오래 남았다. 가격도, 등급도, 복잡한 용어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대신 그곳에서 흘렀던 시간과 감정이 병째로 기억 속에 저장됐다.


스페인의 와이너리들은 친절했다. 과하게 설명하지 않았고, 굳이 감탄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저 땅과 날씨, 기다림에 대해 말할 뿐이었다. 듣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여행이란 원래 그런 것 같았다. 이해하려 애쓰지 않아도, 어느 순간 스며드는 것.


돌아오는 길에 와인 몇 병을 샀다. 하지만 집에서 마신 그 맛은 현지와 조금 달랐다. 대신 이상하게도 포도밭의 공기와 햇빛은 그대로 떠올랐다. 그걸로 충분했다. 스페인에서의 와인 투어는 입맛보다 기억에 오래 남는 여행이었다.



맛보다 오래 남은 건, 그날의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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