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시장은 늘 불공평함에도
공평하고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 좋은 말을 이어 붙이니 맞는 말 같다. 이상적인 사회처럼 보이니까. 마이클 샌델 교수처럼 거창하게 공정이란 무엇일까 생각해보자는 건 아니다. 조금 더 가볍게 생각해보고자 한다.
공정한 사회는 무엇일까?
공정한 사회를 말하기 앞서서 공정이란 단어의 사전적 정의를 말하고자 한다.
'공평하고 올바른'이 공정의 정의이다. 공평한 건 무엇이고 올바른 건 무엇인가. 점점 더 어렵기만 하다.
알고 있는 것부터 시작해보자.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1. 사유재산제에 바탕을 두고 2. 이윤 획득을 목적으로 생산 소비가 이루어진다. 이 중 사유재산제를 인정하지 않거나 혹은 이윤 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것들을 금지한다면 자본주의 사회가 아닌 것이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정함은 그럼 무엇일까. 이윤 획득에 관해 더 생각해보자. 이윤 획득은 싼 것을 비싸게 팔아서 발생한다. 반대의 경우는 이윤 획득이 아니다. 싼 것을 싸게 팔아도 마찬가지로 이윤 획득이 아니다. 그 과정에서 합법적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싼 것을 고도화해서 싸지 않게 만드는 방법을 생각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개인의 노동 자본 혹은 화폐 자본을 이용하여 싼 것을 고도화한다. 이는 합법적으로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며 공정함에 대한 이슈를 만들지 않는다.
그렇지만 더 작은 개념인 공평함에 대한 이슈를 만든다. 노동 자본을 이용하는 집단과 화폐 자본을 이용하는 집단 사이에서의 갈등은 역사적으로 지속되었다. 우리 사회의 근간을 보기에 이는 공정함의 이슈가 되기 어려움에도 왜 공평함에 대한 이슈를 말하는 건지 생각하게 된다. 그 이유는 노동 자본의 약점에 있을 것이다. 상품을 고도화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노동력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감가상각 된다. 화폐 자본은 늙거나 병들지 않는다. 노동 자본은 쉽게 대체될 수 있지만 화폐 자본은 쉽게 대체되지 않는다. 이러한 성격이 다른 까닭에 우린 늘 불공평을 얘기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늘 불공평하다. 사람은 25살부터 노화가 진행된다. 이후 내 몸은 약 50년간 가치가 하락하는 상품이다. 인플레이션을 고려하면 내 몸을 구매하고자 하는 이들은 정신이 나간 게 분명하다. 그렇기에 자본주의 시장에서 노동자는 늘 불공평을 얘기한다. 특히 노동 자본만이 강제된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다. 화폐 자본을 획득하지 못해 노동 자본으로 생계를 지키는 사람이 그러하다. 반대의 경우도 공평하진 않다. 노동력을 상실해 화폐 자본만을 이용해 생계를 지속할 만큼의 소득이 없다면, 그것 역시 공평하다고 볼 수 없다. 소득의 크기가 불공평을 야기하는 것일까? 소득의 크기가 비슷해야 공평한 사회인 것일까?
적어도 불공평한 사회는 공정할 수 없다. 공정의 사전적 정의는 앞서 언급했듯이 '공평하고 올바른'이다. 불공평한 것은 공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린 공정한 사회를 지향한다. 다른 공정의 정의를 생각하고 있는 까닭이다.
청년들의 사정은 어떠할까?
청년들은 어느 정도 화폐 자본과 노동 자본을 선택해서 사용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화폐 자본을 선택하는 것에 '창업'을 예로 들 수 있다. 조사에 따르면 대학생과 직장인 80%가 창업을 생각한다고 한다. 지난 어느 시점보다 현재 창업을 시작하기에 좋은 시기임은 맞다. '청년 창업 지원 사업'은 어느 때보다 활발하고 규모가 크다. 노동 자본을 선택하는 것은 대표적으로 '취업'을 예로 들 수 있다. 어느 것이 낫다고 말할 수 없으며 이 둘 간의 우위는 없다.
다만 화폐 자본의 다른 이름은 '책임'이다. 노동 자본엔 책임이 없다. 코로나 사태에서 어려움을 겪는 자영업자와 그 아르바이트생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늘 화폐 자본을 선택한 사람들이 책임을 진다. 아르바이트생에게 가게 존망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임원급에게 사업의 책임을 묻지, 대리급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
거부감이 들 수 있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의 주제를 밝힌다. 청년들은 노동 자본을 강제당하지 않았다. 아직 어느 누구보다 건강한 신체를 지니고 있으며, 오랫동안 노동 자본을 이용할 수 있다. 사회에서 청년을 바라보는 기대만큼 화폐 자본을 이용하는 것에도 지원이 많다. 화폐 자본을 선택할 수도 있는 셈이다.
화폐와 노동 자본 사이에서 선택이 주어진 청년은 불공정한가? 그들은 노동 자본과 화폐 자본 모두 풍부하다.
이 둘 간의 우위는 없다. 여기서 '자본'이 '큰돈'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님을 밝힌다. 자본은 사전적 정의처럼 생산을 위한 수단을 말한다. 친근한 치킨집 사장님, 편의점 점주님, 골목길 백반집 할머니도 모두 화폐 자본을 이용한 사업자들이다. 그들은 어느 법인 소속의 노동자가 아니다. 화폐 자본을 선택하여 지금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앞서 말했듯이 그들과 일반 직장인간에 우위는 없다.
청년 세대는 어느 때보다 기회의 공평함을 누리고 있다. 모든 기회는 교육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현재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니는 학생은 무상급식을 먹고 무상교복까지 받는다. 더 이상 준비물을 문방구에서 구매하지 않아도 된다. 학교에서 모두 지급한다. EBS 교재는 다른 출판사의 것들보다 싸고 무료로 인터넷 강의를 볼 수 있다. 내가 원하면 하루 온종일을 공부할 수 있다.
또한 스스로 공부하는 것에도, 부모가 자식을 공부시키는 것 모두에 세금이 붙지 않는다. 우리 사회 세금은 징벌적인 면모가 있다. 세금을 많이 내는 사람이 기쁜 마음으로 세금을 내진 않는다. 혜택을 받는 사람도 크게 기뻐하지 않는다. 낸 것을 돌려받는다 생각한다. 교육은 마치 공항의 Duty Free 상품이다. 세금이 없는, 공정을 위한 최고의 도구이다. 불행의 코드가 내재된 청년들은 비교적 공정하다.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공부를 해도 전공을 살려 취업이 어렵고, 창업은 너무 치열하고, 게다가 책임까지 따른다니. 모두 알고 있다. 그것들을 고려하지 않고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단추를 아무리 만들어도 단춧구멍이 없는데 어쩌란 말이가. 공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잘될 거야' 같은 따뜻한 말을 하고 싶진 않다.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청년들의 자본은 풍부하다. 이 사실을 믿고 조금만 더 독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절대로 주 6일 근무에 평균적으로 아이를 2명 기르던 부모님 세대가 더 좋은 시대였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글을 마치기 전 이어령 선생님의 말이 생각났다. '사람은 늙고, 늙으면 병들어 죽는다' 내 몸은 가치가 떨어지는 상품이다. 늘 경계해야 한다. 이를 유지 보수하기 위해서 배움이라는 세금조차 붙지 않는, 최고의 기회가 나에게 있다. 이러한 기회를 내던지지 않기 위해서 오늘도 경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