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산시장을 바라보며
고통을 느끼는 역치는 운동선수와 더불어 일반인도 차이가 없다는 견해가 많다. 쉽게 말해 바늘로 어느 정도 깊이로 찌르면 단련된 운동선수더라도 똑같이 고통이 시작된다. 그렇다면 고통을 최대로 견디는 정도는 어떠할까? 이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과학 잡지로부터가 아니다. 기준금리 인상에 따른 경제체력과 관련된 기사를 읽으면서 든 생각이다.
2006년 미국 기준금리는 5%를 넘기고 피크를 친 이후로 기준금리는 3%를 넘긴 적이 없다. 2008년 리 만사 태이 후로 2016년까지 미국은 제로금리 시대였다. 이후 조금 올리긴 했지만 금세 코로나 여파로 사실상 제로금리시대로 회귀했다.
경제기사를 보면 올해 FED는 2%대로 기준금리를 올린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실제 국채금리도 이를 반영하고 있는 수준이다. 그런데도 주식시장은 꽤나 긴 조정기를 겪고 있다. 경체가 침체된다고 얘기하는 이들이 많다. 무엇이 문제일까? 사실 2%대 금리는 코로나 전으로 회귀하는 수준밖에 되질 않는다.
이제 우리 경제체력은 1%대의 기준금리만으로도 휘청거릴 정도로 고통을 견디는 최대치가 낮아졌다. 주담대 금리 인상으로 부동산 시장을 경고하는 기사가 매일같이 쏟아진다. 2006년의 5%대 기준금리는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 고작 16년 전의 일이다.
미국의 최대 호황기로 여겨지는 2차 세계대전 이후를 생각하게 된다. 그때도 참전한 군인들을 대상으로 없다시피 한 금리로 집을 구매하게 하고, 생활자금을 빌려주었다. 소비의 미국이 이때 탄생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때와 비슷한 모습이 살짝은 겹쳐 보인다.
'최대로 견디는 정도'가 계속 낮아지는 게 비단 자산시장뿐일까 생각이 된다. 사람도 나이가 들며 더 큰 고통을 견디기 어려워지는 게 아닐까. 청년기를 지나며 사람의 생산성은 줄곧 줄어든다. 창의적인 생각도 줄어만 간다. 고통이 시작되는 역치는 나이가 들면서 크게 변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최대로 견디는 정도는 늘 낮아지는 게 아닐까? 나이가 들며 보수적으로 바뀐다는 게 그런 의미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니체의 주장이다. 스트레스가 만든 코르티솔 호르몬은 사람을 움직이게 만든다. 조금 더 생산적으로 만든다. 다만 그런 호르몬의 효과는 내성이 있다. 적당한 스트레스는 더 이상 사람을 움직이게 하지 못한다. 둔해진다. 많은 스트레스를 겪은 이들이 그럴 것이다.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시도하지 못하고, 더 배우길 거부하는 내 모습을 보며 생각이 들었다. 이 틀을 깨야한다. 견디기 어려운 스트레스를 겪던 시기도 지났다. 매우 평온하다. 그렇기에 생산적이지 못한 내 모습은 늘 고통스럽다. '최대로 견디는 정도를 더 높일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