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외적인 것들 속에서
유튜브에서 장기 인공지능 '스톡피쉬'와 프로 장기선수와의 대결을 새벽 내내 시청했다. 당연하게도 여기서 말하는 장기는 보드게임 장기를 말한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결처럼 특별히 열린 경기는 아니다. 카카오장기 앱에서 '스톡피쉬'를 이용해 장기를 두는 사람과 프로선수와의 대결이다. 유튜브에 업로드된 영상을 보다 보니 정신없이 새벽 내내 보게 되었다. 참 유튜브 알고리즘은 고약하다.
프로 9단이니 우리나라에서 제일 장기를 잘 두는 사람 중에 한 명이겠지. 그런 사람과 인공지능의 대결은 매우 흥미로웠다. 바둑은 몰라서 알파고와의 대결을 보며 크게 느낀 바는 없었다. '바둑판을 행렬화해서 엄청난 데이터셋과 더불어 꾸준히 강화 학습했다'는 공학적인 사실만 아주 조금 이해했다.
장기는 달랐다. 수시로 카카오장기를 이용하는 나는 인공지능의 한 수 한 수에 매우 흥미로웠다. 사람이라면 생각하기 어려운 수를 아무렇지 않게 두는 스톡피쉬는 감히 사람이 대적할 상대가 아니었다. 체스 딥러닝에 사용된 모델을 장기에 적용했다나 뭐라나. 유튜브에 검색해 다른 유튜버들의 영상도 찾아봤지만 이긴 경기를 보지 못했다.
전세가 50대 50으로 몇십 수를 겨루다가도 스톡피쉬의 어느 한 수에 전세가 뒤집혔다. 48대 52로 인간이 불리해졌다. 이후로도 전세를 뒤집지 못하고 패하는 경기가 대부분이다. 존재하지만 예외적인 수, 즉 인간이 생각하지 못하는 수가 전세를 바꾼 것이다. 여기서 나는 '예외의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장기를 보며 '예외의 수'를 떠올린다는 게 자연스러운진 모르겠다. 그렇지만 예외의 것에 어떤 느낌을 받는지 묻고 싶다. '예외적으로~'라고 시작되는 무언가를 읽으면 혹시 부정적인 마음이 들진 않는가? 특별히 봐준다는 인식을 갖고 있진 않은가? 그렇지만 예외의 것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서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세상을 세 가지의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세상은 '법계, 자연계, 기호계'로 구분된다. 법계는 말 그대로 사람이 정한 규율의 세계. 자연계는 바다가 출렁이는 것과 같은 자연을 말한다. 기호계는 선호하는 것과 선호하지 않는 것의 구분이다.
자연계를 생각해보자. 지구 전체를 하나의 계로 보면 이는 점점 복잡해진다. 전체 계에서 엔트로피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열역학 제2법칙이다. 법계 또한 날로 복잡해진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를 적용하며 법전은 두꺼워지지 얇아지지 않는다. 만약 세 가지가 균형을 이룬다면 기호계 역시도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무언가를 선호하는 케이스는 늘 복잡해지고 있는 것이다. 세상은 날로 복잡해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예외의 수'도 늘 발생한다. 복잡한 것을 계속해서 구분하려다 보면 법전의 조문은 갈수록 늘어나기 때문이다. 점차 일반론에서 벗어난다. 이어령 선생님은 우리나라 사람만큼 일반론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실제 일반론은 어떠한 문제도 해결해줄 수 없다.
예를 들면 '기부입학' 같은 이슈이다. 미국의 아이비리그 학교의 경우 대부분 기부입학을 허용한다. 가령 10억을 기부하여 입학한 학생은 가난하지만 영특한 학생 열 명치의 학비와 기숙사비를 댈 수 있다. 학교재단 입장에서는 재정건전성을 확보할 수 있다. 그들이 입학한 것은 모두에게 긍정적인 효과를 준다. 마음속에 그들이 학교의 명예를 실추할 거라고 예단하고 있지 않은가? 공정치 못한가? 하지만 그들이 학교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앞선 상황에서는 단 하나도 없다. 공정을 얘기하는 입시에서 조차 예외적인 수는 필요하다.
무언가 논의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정확한 매뉴얼이 있으면 만사형통일까? 앞선 사례가 설령 있다고 한들 적용하기 어려운 상황이면 어떡하겠는가? 때에 따라 당연히 다르게 대응해야 한다. 매뉴얼에 정확히 따르지 않는 사람을 비판하고 싶은가? 매뉴얼은 예외적인 수를 위한 일반론일 뿐이다. 앞서 말했듯이 일반론을 우리나라 사람은 중시하지만 실제 그런 것들이 유용하게 작동하는 경우는 드물다. 예외적인 수를 늘 고려해서 대응해야 한다.
예외적인 것은 게다가 인공지능의 한 수처럼 아이러니하다. 승진제도를 포함한 인사제도에 있어서는 '혹시나' 예외적인 수가 본인에게 적용되길 바란다. 혹시나 부장님이 나를 좋게 봐줬으면. 나와 동향인 그가. 나와 동문인 그가 도와주지 않을까? 그러면서도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적용된다면 분노를 참지 않는다. 아이러니하다.
예외적인 수는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이를 유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부정을 가만 두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적어도 예외적인 것을 부정적인 것으로 마음속에 확정 짓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