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에게 중요한 이야기
당신은 이해와 동의를 구분하는가? 아마 이 이야기를 처음 읽었을 때는 <아들러 성격 상담소> 책을 읽고 있던 때 일 것이다. 자세히 기억이 안 나니 오히려 옮겨 쓰는 독후감 형식이 아니게 되었다. 각색한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이해와 동의를 우리는 구분해야 한다. 구분하지 않은 때 필히 오해가 발생하고 아들러가 말했듯이 인간관계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크다.
이해는 무엇일까? 우린 대부분의 것들을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TV토론에서 양측의 의견이 첨예하게 갈린다고 생각해보자. 우리는 첨예한 토론 가운데 논객들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다. 어떠한 주장인지, 어떠한 논거로 이야기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양측의 의견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동의는 한자어 그대로 의견이 같다는 뜻이다. 의견이 같아서 너와 함께 할 수 있다는 이야기인 셈이다. 사형제도에 대해 찬반을 이야기한다면 나는 부분적으로나마 어느 한 의견에 동의할 수 있다. 이해와 동의를 구분하지 않을 때 우리는 어려움을 겪는다.
예를 들면 오늘 부장님이 회식을 하자!라고 했다면 어떨까? 우린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회식을 하고자 하는 그 마음, 그 의도까지도 이해할 수 있다. 팀 내 분위기 고취? 그래, 다 이해할 수 있다. 그 정도도 이해 못 할 바보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밤새 술 먹는 회식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이해한다는 뜻으로 웃음을 내비쳤지만 나는 집에 가고 싶다. 이를 구분하지 않는 부장님이라면 모두 다 회식에 동의한 걸로 이해해 거침없이 진행하지 않을까?
하물며 연인관계는 어떤가? 여자 친구(남자 친구)가 하는 이야기를 모두 이해할 수 있다. 그의 행동도 여지없이 이해할 수 있다. 이해 못 할 만큼 내가 어리석지 않음에도 동의하는 것과는 별개이다. 이것이 극단으로 가면 가스 라이팅과 같은 사회적 문제가 될 수 있다. 상대가 내 말을 모두 이해한다고 해서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상대방이 내 말에 이해하는 것인지, 혹은 동의하는 것인지를 구분해야 한다. 이해만 하는 것은 나와 뜻을 같이하는 것이 아님에 꼭 유의해야 한다.
이해와 동의를 구분할 때 조금 더 성숙해질 수 있다. 이해는 판단론이고 동의는 행동론에 가깝다. 이해는 아름다움을 구분하는 미추론에 가깝고 동의는 행동에 의한 선악을 구분하는 셈이다. 우리 사회는 좋은 게 좋은 것이라 여기는 경우가 있다. 이것에 구분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착한 사람은 얼굴에 나타난다'는 식의 이야기는 옳지 않다. 착한 것과 생긴 것은 분명 별개의 문제이다. 잘생긴 살인마도, 추하게 생긴 자선사업가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