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는 칭찬은 수직관계를 만든다며 비판했다. 어린 시절 '잘한다, 장하다.' 등과 같은 칭찬은
부모가 자식을 무의식적으로 아래로 보는 상하관계를 만든다고 했다. 부모와 자식은 수평관계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야단도 마찬가지의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교육자로서 상벌 교육을 하지 말라
책에서의 철학자의 말들은 아들러 심리학인 목적론을 기반으로 한다. 칭찬의 목적은 본인보다 아래임을 상기시키는 행위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상대방을 조종하기 위한 목적이 숨어있고, 사랑과 존경의 마음과는 무관한 것이다. 칭찬에 대해 비판적인 내용이 낯선 느낌을 준다.
이 책에 심취했을 때엔 나는 다른 사람에게 칭찬이 인색한 사람이 되었다. 책에서 말한 대로 나는 그들과 상하관계가 아니다. 내가 더 잘나지 않았음에도 칭찬한다는 것은 '오만하다' 생각했다. 물론 존경과는 무관하다.
칭찬의 중요성을 강조한 책들이 많다. 흔히들 교육자 혹은 부모의 입장에서 아이를 칭찬하는 방법론들이다.
아이의 행동에 대해 칭찬하고, 구체적으로 칭찬하며, 그 방법 또한 아이의 나이에 따라 다르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다. 칭찬에 대해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는 책은 잘 없다. 칭찬은 마냥 아이에게 용기를 불어넣고 무한한 에너지를 줄 것 같다.
교육자가 아닌 아이의 입장에서 칭찬받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다. 각자 기억에서 칭찬받았던 기억을 소환해보자. '뿌듯해서 헤헤 거리며 돌아갔던 기억' 그 외에 다른 것은 없었는지 생각해보자.
아이 입장은 다르지 않을까?
칭찬받았던 최고로 오래된 기억은 유치원생 때였다. 나는 파랑반 6살 원생이었다. 받아쓰기 시험을 치는데
1번 문제는 '사과'였다. '사과' 그래. 잘 써냈다. 2번 문제는 '화가'였다. 앞에 '사과'를 써내고 나니 '화가'인지 '화과'인지 너무 헷갈렸다. 선생님의 의도된 출제였을까. 6살의 최대 고민이었다. '화가' 일까 '화과' 일까.
난 '화가'로 찍고 받아쓰기 시험을 모두 맞았다. 칭찬을 받고 난 받아쓰기를 잘하는 어린이가 되었다.
받아쓰기를 잘하는 어린이가 되고 나니 난 앞으로도 받아쓰기를 잘하는 어린이가 되어야 했다.
'복숭아'와 '봉숭아'가 뭐가 다른 건지 생각해야 했다. 지금 생각하니 작은 압박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7살 노랑반 시절엔 띄어쓰기에 대해 생각해야 했다. 물론 지금도 띄어쓰기 문법에 대해 잘 모른다.
아들러의 목적론에서 칭찬은 상하관계를 만드는 부정적인 것으로 소개되었다. 아무리 어린아이 일지라도
수평관계를 가져야 한다. 그렇지만 어린 시절 아이는 엄마 치맛자락 붙들고 쫓아다니는 게 취미이자 재미다. 그것이 전부였다. 치맛자락을 놓치면 엄마가 사라지는 것이다. 이내 울음이 터진다. 어른 입장에선 상하관계를 안 만들어도 아이 입장에선 상하관계가 이미 존재하는 것 같다.아이에게 엄마는 예쁜 절대자였다.
상하관계가 어른 입장, 아이 입장이 다르다고 쳐도 칭찬이 동력이 된다는 표현은 맞는 것 같다.
기계공학을 전공한 나로서 동력이란 말을 보면 '일'을 생각하게 되고 이는 '에너지'의 개념으로 이어진다.
칭찬은 작은 압박이자 적당한 스트레스, 그걸로 일을 하게끔 만드는 동력원이 아닐까. 너무 많은 칭찬은 과전류를 만들어 기계를 망가뜨리지 않을까. 작은 칭찬들은 기계를 녹슬지 않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