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걸어보기.
뒷짐을 지고 걷는다는 것은 보통 좋지 않은 태도라 여겨진다. '뒷짐지다'라는 말이 책임을 회피하거나 거만함을 표현하는 말로 종종 사용되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누군가가 뒷짐지고 걷는 모습을 상상하면 '꼰대'의 이미지가 떠오를 뿐이다. 그러다 작년 겨울, 제주에서 한달살기를 하며 뒷짐을 지고 걷는 것의 순기능을 발견했다.
나는 걸음이 매우 빠르다. 빠르게 걷는 것이 습관이 되어 걸음의 속도를 늦추면 걸음걸이가 어색해질 정도이다. 벚꽃이 흐트러진 꽃길을 걸을 때,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고즈넉한 삼청동 골목을 걸을 때조차 나도 모르게 빠르게 걷는다. 빠르게 걸으면 빠르게 변하는 주변 풍경을 처리하느라 눈과 뇌가 바빠진다. 분비되는 아드레날린으로 심장도 같이 바빠진다. 나에게 사색할 여유를 빼앗아간다.
제주 한달살기 동안 둘레길을 참 많이도 걸어다녔는데, 해가 질 무렵이면 그 눈부신 풍경을 눈에 담고싶어 천천히 걸으며 사색하고 싶을 때가 많았다. 하지만 난 도무지 느리게 걷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서 나도 모르게 걸음걸이가 점점 빨라지곤 했다.
그러다 문득 뒷짐을 지고 걸었다.
내 걸음걸이는 마치 조선시대 양반마냥 느려지기 시작했다. 뒷짐을 지고 나니 빠르게 걷는 방법을 잊었다. 뒷짐을 지고 어떻게 빠르게 걸을 수 있겠는가!
천천히 걷는 것은 빠르게 걷는 것과는 다른 시야를 열어준다. 많은 사람들이 천천히 걷는 방법을 잊고 살아간다. 생각에 잠기기 좋은 조용한 길이 있다면, 그곳을 찾아 뒷짐을 지고 걸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