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ulsion

by 병우

이멀전(Emulsion), 우리말로 '유화'라고 부르는 이 상태는 본래 서로 섞이지 않는 물질들이 섞여 있는 새로운 상태이다. 예를 들어 물과 기름이 섞인 후 분리되지 않고, 어떤 보조 물질의 도움을 받아 분산된 상태를 유지하며 마치 하나의 새로운 물질처럼 보이는 혼합물이다. 이때 쓰이는 보조 물질은 유화제라고 부른다.


앞의 설명이 다소 인위적인 가공 기술처럼 들릴 수 있지만 사실 이멀전은 자연상태의 식재료로 많이 존재한다. 보통은 여러 유제품과 달걀노른자, 마요네즈 정도가 이멀전이라고 들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생명체 내부에 있는 거의 모든 지방은 이멀전의 형태로 존재한다. 오히려 어떤 이유로든 이멀전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면 문제가 생긴다. 피지, 담석이나 동맥경화를 일으키는 콜레스테롤 덩어리들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


섭취한 지방은 유화 과정을 거쳐야만 장에서 흡수될 수 있다. 또한, 그래야만 혈액과 분리되지 않고 혈관을 타고 이동하며, 필요할 때 꺼내 쓸 수 있는 형태로 차곡차곡 지방세포 안에 저장될 수 있다. 에너지로 쓰기 위해 다른 세포로 다시 이동할 때도 마찬가지이며, 최종적으로 조각조각 분해될 때까지 유화 상태를 유지해야만 한다.


따라서 우리의 몸은 유화된 지방과 그냥 지방을 구분할 줄 알며, 둘에 대해 다르게 반응한다. 우선은 ‘느끼함’의 체감 정도가 다르다. 식용유 1스푼을 먹으면 당장에 느끼함을 주지만, 마요네즈는 그 몇 배를 먹더라도 식용유만큼의 느끼함이 생기지 않는다.


느끼함 뿐만이 아니다. 이미 유화된 상태로 섭취된 음식은 몸이 더 잘 인식하기 때문에 담즙이나 지방 소화 효소도 빠르게 많이 분비한다. 게다가 이미 지방 분자들이 분산된 상태이므로 반응성도 높아 소화가 훨씬 더 잘 된다. 지방은 충분히 소화·흡수되지 못하고 대장까지 이동하면 설사를 유발할 수 있다.


하지만 효소의 장기적인 과다 분비는 췌장에 무리를 준다는 연구가 있다. 따라서 유화된 지방은 안 된 지방에 비해 몸이 안전하게 효율적으로 섭취하기 좋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한 없이 많이 먹어도 문제없는 것은 아니다.




요리를 할 때 만드는 이멀전은 먹기 좋을 뿐만이 아니라 섞이기 전의 물성을 넘어서는 새로운 감각을 제공한다.


콩을 곱게 갈아 지방이 골고루 퍼지면서 만든 콩물의 질감은 부드럽고 크리미 해진다. 찰랑거리던 식용유와 식초가 유화되면 마요네즈처럼 점성이 생겨 묵직하고 되직해질 수도 있다. 우유와 설렁탕 속의 미세하게 퍼진 지방은 빛을 산란시켜 불투명한 유백색을 만든다. 마지막에 참기름을 넣어 버무린 비빔국수에선 빛반사로 윤기와 광택이 나타난다. 잘 퍼져서 걸쭉한 들깨 국물은 입 안에서 기름지게 남아있지 않으면서도, 금세 씻겨가지도 않아 향이 더 오래 남는다. 이멀전 구조 덕분에 공기를 포집한 아이스크림은 열전도율이 낮아져 천천히 녹을 뿐 아니라 입 속에서도 차가움의 체감이 덜하다. 유화가 잘 된 소시지는 지방과 수분을 잘 간직해 탱글탱글한 식감을 제공한다.


믹서기만 있어도 대부분의 이멀전을 만드는 건 어렵지 않다. 다만 다시 분리되는 것을 막으려면, 그 원인과 사례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가장 흔한 경우는 유화제로 쓰인 성분이 기능을 잃어버리는 경우이다. 유화제의 종류에 따라 주변 환경(온도, pH, 염도)이 변하면 그 기능을 잃어버릴 수 있다. 따라서 유화제의 특성을 이해하고 적정 범위를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50-60도 사이의 계란 노른자 특성을 이용한 홀랜다이즈나 커스터드는 너무 가열하면 유화제인 단백질이 응고한다. 크림소스에 레몬을 너무 많이 넣으면 pH 변화에 반응해 응고해 버리고, 콩물에 너무 일찍 소금 간을 해 두면 분리가 일어난다. 우유에 산을 넣어 리코타를 분리하거나, 두유에 간수를 넣어 두부를 분리하는 것은 같은 원리를 거꾸로 이용하는 사례다.


너무 높은 온도나 낮은 온도에서는 유화제의 기능이 유지되더라도 분리가 일어날 수 있다. 진한 사골육수를 오래 끓이면 보이지 않던 기름층이 계속 분리되어 나오는데, 분산되어 있던 기름방울끼리 충돌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온도가 낮아 기름이나 물이 고체화될 때에도 분리가 쉽게 일어난다. 마요네즈 속 물이 얼었다 녹아 분리되고, 육수를 차게 식히면 원래 이렇게 많았나 싶은 양의 지방이 나와 굳는다.


단순히 물과 기름의 비율이 맞지 않는 경우에도 유화 상태가 무너질 수 있다. 한쪽 입자의 양이 너무 많아지면 구조적으로 분산을 유지하기 힘들기 때문에 둘 중 하나의 부피가 전체의 74%를 넘으면 물리적인 저항이 급격히 커진다. 샐러드드레싱의 기본 레시피가 대부분 3:1로 이루어진 것은 이 때문이다. 최대한 많은 양의 기름을 넣고서도 유화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밸런스이기 때문이다. 계란 노른자처럼 강력한 유화제를 사용하면 조금 더 기름을 넣어 마요네즈를 만들 수 있다. 소스를 졸이다가 수분이 너무 줄어들어 이 밸런스가 깨지고 기름이 뜨는 경우도 많다. 초기 단계이고 유화제가 망가진 것이 아니라면 대부분 물을 조금 넣으면 해결된다.


과도한 물리력이나 마찰열도 주의할 요소다. 크림을 오래 휘핑하면 잘 유지되고 있던 지방과 유화제의 결합에 손상이 생기면서 버터가 생긴다. 소시지를 반죽할 때 얼음을 넣지 않고 커터기를 너무 오래 돌리면 마찰열로 지방이 녹으면서 제대로 유화가 되지 않는다.


이멀전을 만드는 과정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기름 넣는 속도다. 기름을 잘게 나눈 후, 기름과 기름이 다시 만나기 전에 유화제를 만나야 유화가 가능하다. 그래서 한 번에 모든 재료를 넣고 섞으면 성공하기 어렵고, 기름을 조금씩 넣어주어야 잘 만들어진다. 예외적으로, 폭이 좁은 용기에 계란, 식초, 기름을 모두 넣고 핸드블렌더로 맨 아래부터 갈아주면 자연스럽게 위에서 아래로 기름이 조금씩 빨려 들어가기 때문에 한 번에 성공할 수 있다. 하지만 위아래로 잘 섞이는 큰 믹서기에선 이런 일이 일어나기 어렵기 때문에 기름을 위에서 천천히 흘려 넣어야 한다. 물론 힘이 센 믹서기에는 좀 더 빨리 흘려 넣어도 된다.




이멀전을 만들고 유지하는 것은 많은 요리의 핵심 기술이며, 생물학적으로도 자연스러운 식품의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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