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경도

by 병우

경도 (hardness)란, 물 속에 녹아 있는 칼슘과 마그네슘 이온의 총량을 말하며, 적으면 연수(단물), 많으면 경수(센물)라 분류한다. 지역별로 그 차이가 뚜렷한데, 이는 지하수 또는 표층수가 맞닿은 지반의 특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보통 석회암 등의 퇴적암 지대에서는 미네랄이 다량 용출된 경수가, 화강암 지대에서는 연수가 주로 난다. 수치로는 100-120ppm 을 기준으로 구별되며, 한국은 50ppm 정도의 연수가 일반적이다.


연수와 경수는 모두 위생 처리를 거치면 식수로 적합하지만, 마셔보면 그 맛 차이가 분명하다. 연수에 익숙한 우리 입맛에 경수는 텁텁하고, 경우에 따라 석회향과 금속성의 맛이 나며 그 여운도 꽤 길게 남는다. 하지만 유럽에는 오히려 이런 미네랄의 풍미를 내세운 고급 생수 브랜드가 많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물맛의 차이가 각 지역의 식문화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왔다는 사실이다.


성분이 순수하여 다양성이 적은 연수와 달리, 경수는 미네랄 구성에 따라 그 특성이 다채롭게 나타난다. 가장 함량이 높은 칼슘에 한정하여 살펴보면, 기반이 되는 지질에 따라 탄산칼슘, 황산칼슘, 염화칼슘이 다르게 들어있다. 이 중 탄산칼슘 함량이 높으면 산(Acid)을 중화하여 pH변화를 억제하고, 황산칼슘이 많으면 특정 와인이나 맥주에서 느껴봤을 ‘날카롭고 드라이한’ 맛의 원인이 된다. 염화칼슘은 물에 잘 녹아 특히 뜨거운 온천수 등에 높은 농도로 들어있으면 매끈하면서도 점성이 느껴지는데, 적당히 들어있으면 둥글거나 묵직하다고 표현할 만한 물맛을 준다.


이러한 차이가 가장 두드러지는 분야는 술, 차, 커피 등 음료 문화이다.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서 묵직한 스타일의 에일을 만들 때, 체코 플젠 지역에서 연수를 이용해 만든 ‘필스너’는 깨끗하고 맑은 스타일로 최초의 라거 시대를 열었다. 이후 일본, 미국 동부 등 연수 지역에서 고품질의 라거 맥주 생산이 이어진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증류주도 마찬가지다. 증류 과정에서 원래 술에 있던 미네랄은 제거되지만, 원액에 물을 더해 도수를 맞추는 과정에서 물의 성질이 다시 개입한다. 알콜에 녹아있던 풍미 성분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선 미네랄이 반응할 여지가 없는 연수가 유리한데, 이런 특성을 잘 살린 예가 스코틀랜드의 싱글몰트 위스키다.


녹차는 연수에 우려내면 섬세한 맛이 나지만 탄닌 추출을 촉진하는 경수에서는 쓰고 떫은 맛이 강해진다. 그래서 중국 내 연수 지역에서는 녹차, 백차를 즐기지만 경수 지역에서는 경수를 써도 맛이 무난한 홍차나 보이차를 즐긴다. 영국에서는 맛을 중화시키기 위해 우유를 첨가하는 밀크티 문화가 발달했다.


커피의 전파와 추출기술의 발전은 매우 복합적이지만, 물의 경도와도 꽤 연관이 있어 보인다. 커피를 덜 볶아 원두의 산미와 향을 살리는 스페셜티 커피 문화는 연수 지역인 북유럽에서 시작되었다. 반면 전통적으로 강하게 볶은 커피와 증기를 이용한 에스프레소 기술 중심의 커피 문화는 경수 지역인 유럽 남부에서 인기가 좋다. 커피 농도를 조절할 때도 물보다는 우유를 활용한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경수 지역에서 주문하면 굉장히 낯선 맛이 난다.


요리의 영역에서도 물의 경도는 큰 영향을 미친다.


국물 요리의 지역색은 물의 경도와 깊은 관계가 있다. 미네랄은 육수에 우러나온 유리 아미노산 및 향미 성분과 결합해 풍미의 발현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 따라서 경도가 다른 지역의 레시피를 그대로 따라해도 같은 맛을 내기 어렵다. 경수를 오래 끓여 농축하면 금속성의 맛이 강해질 수도 있어, 이런 지역에서는 물 대신 술이나 우유를 졸이는 조리법이 선호되기도 한다.


경수의 성분 중 특히 칼슘은 식물의 조리에 관여한다. 세포벽을 구성하는 펙틴에 열을 가하면 물에 녹는 형태로 변하며 부드러워지는데, 이 때 칼슘 이온이 있으면 펙틴을 '붙잡아' 조직감이 유지된다. 피클이나 통조림 제조 시 염화칼슘을 첨가하거나, 삶을 때 경수를 사용하면 단단함이 잘 유지되는 원리다. 연수 지역인 한국에서 김치용 채소를 절일때 꼭 천일염을 써야 무르지 않는 것도 칼슘 때문이다. 바닷물은 경도가 5000ppm이 넘어가는 초고경수이며, 경수의 원천 또한 오래전 바다였던 곳의 암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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