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왜 사서 고생하는 중인가

연재칼럼-3

by 오숙하

얼마 전 직장 동료들과 둘러앉아서 담소를 나누는데, 우연히도 고양이를 키우는 세 사람이 근처에 앉게 되었다. 한 사람은 한 마리, 나는 두 마리, 다른 사람은 세 마리 고양이의 집사였다. 세 사람은 각자 고양이에 관련한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곧 여행을 가는 세 마리의 집사는 고양이를 부탁하던 사람에게 사정이 생겨서 다른 사람을 찾는 중이라고 했다. 한 마리 집사의 고민은 고양이를 돌볼 시간이 부족해서 다른 가족의 집에 보내려고 했다가, 고양이가 없는 적막한 집을 상상할 수 없어서 그만두었다고 했다. 나의 고민은 고양이 두 마리가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이다. 덩치가 좀 더 큰 햇살이가 소심한 달빛이를 수시로 괴롭힌다. 싸움을 목격할 때마다 소리도 치고 내 딴에는 훈계도 하지만 효과가 있을 리가 없다. 학교폭력의 가해자 학생의 학부모 된 기분이랄까? 내가 사랑하는 존재가 나쁜 짓을 저지른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참 난감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잇몸에 염증이 있어서 곧 발치를 해야 하는 달빛이에게 매일 항염제를 먹여야 하는데 이 녀석을 품에 안고 입 안에 주사기를 넣어서 물약을 흘려 넘기기까지 꽤 고단한 과정을 거친다. 매일 밤 반복되는 상황은 이렇다. 저녁때가 되면 달빛이와 나의 추격전이 시작된다. 내가 조금만 다가가도 달빛이는 기가 막히게 눈치를 채고 도망간다. 처음에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구슬려보지만 소용이 없다. 결국 채 3킬로도 안 되는 이 녀석을 붙잡으려고 집안을 뱅뱅 돌다가 서로가 지쳐갈 때쯤 내가 무력을 써서 다소 거칠게 달빛이를 들어 올린다. 내 품 안에서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을 치는 달빛이의 발톱에 할퀴어진 상처가 내 팔과 다리에 여기저기 남겨진다. 5년도 넘게 함께 한 나를 왜 아직까지도 못 믿는 걸까? 내가 그렇게 무섭나? 서운한 마음이 들고 내가 왜 이 짓을 한 달 넘게 계속하고 있는지 한심한 생각이 든다. 약을 다 먹으면 곧 이빨을 빼기 위해 동물병원에 데려가야 할 텐데, 병원비도 무시할 수 없다. 내가 왜 이 고양이들에게 밥을 주기 시작하고, 중성화를 시키고, 인식칩까지 심어서 내 삶에 들인 걸까? 고양이들이 부탁한 일이 아니데도 말이다. 지독한 냄새를 참아가며 고양이 똥을 치우고, 슈퍼에 가면 내 식료품보다 고양이 사료를 더 많이 살 때도 있다. 나를 비롯해서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왜 이 고생을 하면서 반려동물과의 삶을 선택하는 것일까? 딱히 외로워서는 아닌 것 같다. 어쩌면 원시시대 때부터 생존을 위해서 가족과 부족사람들을 챙기는 습성이 유전자에 깊게 각인되어서 인 줄도 모르겠다. 누군가를 돌보는 행위가 우리에게 안정감과 소속감을 느끼게 하는 것일까? 아니면 말을 못 하는 존재들이라서 그들도 나를 사랑해주고 있다고 착각하기 쉬워서 그런 걸까? 고양이들이 말썽을 부리고, 사고를 쳐서 뒷수습을 감당해야 할 때 고양이들을 입양하기로 한 결심이 솔직히 후회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퇴근하고 집에 온 나를 보고 발라당 바닥에 누워버리는 햇살이의 하얀 배를 볼 때, 한 밤 중에 잠에서 깨었을 때 어느샌가 내 곁에 와서 자고 있는 달빛이를 볼 때, 가슴 한편에 먼지처럼 쌓여있던 후회와 짜증이 스르르 녹아 사라져 버린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옆에 와서 엉덩이를 치켜들며 두들겨 달라고 요구하는 달빛이의 모습에 실소가 터진다. 비효율과 사랑은 비례한다. 자본주의는 설명할 수 없는 사서 하는 고생이 곧 사랑이 아닐는지.


image.png 평생 거리 두기를 실천 중인 달빛(좌)과 햇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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