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칼럼-21
타인의 사유지에 심겨있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는 것은 '서리'라고 한다. 하지만 내 땅에 오래전에 누군가가 심어놓은 나무의 열매를 따먹는 행위에는 특정한 명칭은 없는 것 같다. 이사 온 지 5년째 된 집의 뒷마당에는 포도나무가 심어져 있다. 이사오기 전에는 그 존재를 알지 못했다가 나중에 문득 포도송이들이 달려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따서 먹어보니 아주 달았다. 내가 심기는커녕, 있는 줄도 몰라서 물도 주지 않는데도 포도는 매년 여름이면 어김없이 열매를 맺어준다. 올해도 제법 많이 열려서 한번 따서 부모님에게 나눠드리고 나도 제법 먹었다. 이제는 포도가 더 열리지 않고, 달린 열매도 말라가는 것 같아서, 그나마 먹을만한 포도알들을 다 수확하고 씻어서 냉동실에 넣어두었다. 포도를 씻으면서 한알씩 맛을 보는데, 참 달다. 전에 이 집에 살던 사람이 오래전에 씨를 뿌렸든지 모종을 심었던 것이 지금은 여름마다 어김없이 싱그러운 잎사귀들을 펼쳐서 열심히 광합성을 하고, 다디단 포도를 만들어준다. 이 포도나무를 심었던 사람에게 느끼는 고마움을 생각하다가, 오래전 돌아가신 할머니가 생각났다. 아빠와 고모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시고, 희생으로 점철된 삶을 사셨던 분이다. 그분이 심어두신 행복의 씨앗이 자라서, 지금은 큰 나무가 되어 우리 아빠와 가족이 누리고 있다. 최근 내란에 관련된 뉴스를 접하면서, 한국의 민주주의가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시민들이 뿌리고 가꾼 용기와 희생에 큰 감사함을 느낀다.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 또 훨씬 옛날에 온갖 외세의 침략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싸웠던 조상들까지 생각하면, 내가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예전에 심어둔 자유와 행복의 씨앗이 자라서 나무가 되어 열매를 맺었기 때문이다. 요즘 사회에서 정의라고 인식되는 민주주의와 인권, 또 여권은 수많은 사람들이 치열하게 싸워서 얻은 소중한 가치들이다. 공짜로 따먹는 포도라고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 열매의 시작점을 되짚어보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열매의 달콤함을 음미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