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찰나 - 마음 놓고 행복해도 되는 시간

연재칼럼-26

by 오숙하

진로선택의 기로에서 아주 괴로웠던 시기가 2년 정도 있었다. 미래가 그려지질 않았고, 나 자신이 너무도 초라해서 자존감은 바닥을 치고 늘 우울했던 최악이 나날들이었다. 그때는 스트레스와 불안감을 해소하려고 많이 걸었다. 집 밖을 나가서 동네 한 바퀴를 아주 크게 돌고 오는 것이었는데 일단 출발을 하면 집에 돌아올 때까지는 오로지 걷고 생각하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가끔 음악이나 무언가를 들으면서 걷기도 했는데, 아무튼 한 시간 정도 되는 그 시간만큼은 무조건 걸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 시간만큼은 나는 다른 걱정을 할 필요 없이 무조건 걷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 시간만큼은 내가 할 수 있는 게 걷는 것 하나뿐이니, 내가 못 하고 있는 것들, 미루고 있는 것들에 대한 죄책감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생각이 되었다. 집에 들어가면 다시 고민의 블랙홀로 돌아가겠지만, 걷고 있는 시간은 일종의 현실도피였다. 내가 더 노력하려고 해도 할 수 없고, 이미 100%의 최선, 즉 두 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집에서는 재미있는 영화를 보고 맛있는 걸 먹어도 마음 한편이 늘 불편했다. 이럴 시간에 이력서 하나라도 더 쓰고, 공부 한 자라도 더 해야 하는 건 아닌지 불안해서 맘 편히 즐거워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하루에 한 번씩은 꼭 산책을 했고,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 요즘에도 가끔 내가 오직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 오면 '완벽하게 행복해도 된다'라고 자신에게 허락을 해준다. 가령, 동네 한 바퀴를 뛰는 동안에는 한 번 뛰러 나갔으니 돌아올 때까지는 부지런히 발을 움직이는 것만 하면 되고,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다. 하이킹을 가면 다시 집에 도착할 때까지는 걷기만 하면 된다. 운전을 해서 목적지에 가는 동안도 그렇다. 내가 집중할 수 있는 것은 사고를 안 내고 운전을 하는 것뿐이니 차 안에서는 안심하고 행복을 느껴도 된다. 여러 가지 선택이 가능한 환경에서는 마주할 수 없는 선명한 빛깔의 행복을 볼 수 있다. 모든 이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행복의 공식은 아닌 듯 하지만, 나에게는 오직 한 가지만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의 단순 명료함이 행복의 기본값인 듯하다. 여러 가지를 선택할 수 있을 때 기회비용을 저울질하는 것이 피곤해서인 것도 같다. 오늘은 감기가 걸렸고, 비가 많이 와서 평소와 달리 달리기를 못하고, 다른 집안일도 쉬고 있다. 몸은 괴롭긴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자의든 타의든 제한되어서 못 하는 일에 대한 아쉬움을 떨쳐버릴 수 있으니 마음이 더 편하다. 검색해 보니 '선택의 역설'이라는 표현이 있다. 너무 많은 선택이 주어지면 오히려 심리적 스트레스를 받고 오히려 선택지가 별로 없는 상태가 심리적 안정을 준다는 것이다. 일상에서 내게 딱 하나의 과제만 주어진 순간들을 놓치지 않고 포착해서, 찰나의 행복을 더 많이 누려야겠다.

image.png 백수 시절의 구원이었던 산책 by 나노바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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