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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Jun 02. 2022

축제

얼마 전 대학교 축제가 있었다. 


친구들이 함께 공연 보자고 했는데 안 갔다. 

주점이나 갈까. 그런 생각도 했었지만 대기줄은 길고 사람은 많았다. 

와글와글, 그 자체로도 벌써 지친다. 

그리고 혼자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는 10대 시절에도 축제를 즐기지 못했다. 무엇보다, 그때는 모두 참석했어야 했기에 스트레스가 더욱 심했다. 필수 참여의 압박에 한번 짓눌리고, 축제의 열광 속에 어울리지 못하는 나 자신을 자책하기도, 미워하기도 하면서 스스로를 짓눌렀다. 만약 내가 노래를 좋아했으면 축제를 만끽할 수 있었을까? 최소한 지루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음악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다루어야겠다.)


그러나 이제는 여유가 생겼다. 이것저것 즐기지 못해도 괜찮았다. 

물론 남들과 조화되지 못하는 상황은 여전히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나 혼자 이방인이 된 듯한, 그런 위화감은 아직도 고통스럽다. 

다만 내 마음속, '숨 쉴 공간'이 넓어졌다는 게 기쁘다. 나의 밀실에 여유가 깃들어서 기쁘다. 

그리고 중학교 때부터 이어져온 그 밀실에는 '책'과 '펜'만이 있을 뿐이다.


저마다의 밀실이 음악으로 채워져 있든 운동으로 채워져 있든 미술로 채워져 있든 게임으로 채워져 있든 술로 채워져 있든, 그 밀실을 꾸밀 자유는 각자에게 있다. 취향은 기호의 문제이지, 당위의 문제가 아니다. 사적인 취향마저 해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취향의 도덕화는 더욱 언짢고, 교양과 속물의 구분은 무너뜨리고 싶다. (교양과 속물, 성스러움과 속됨, 정상과 비정상. 그 분별의 우연성은 나중에 다루어야겠다.) 다만 당사자가 변화를 원할 때, 그 사람이 우려스러울 때. 그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도 늦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글 쓸 때의 그 다짐은 금세 사그라진다. 교양과 속물을 구분하고 받아들이는, 그 태도를 물리치기란 너무 어려웠다. 머리는 열려있지만 마음은 닫혀있다. 글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서로 화해했으면 좋겠다.




축제에 대해 교수님께서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고 하셨다. 아래는 나의 기억으로 거칠게 재구성한 것이다. 


"대학이 학문의 상아탑이라는 이야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지식인으로서 (...) 싸이 초청에만 5000만 원 이상이 들고 (...) 공연은 유튜브로 볼 수도 있는데, 그 돈을 다른 좋은 곳에 사용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축제만 하면 쓰레기, 무질서, 범죄, 등록금, 입장 팔찌 밀거래, 안전사고 등의 이슈가 끊이질 않는다. 게다가 비싼 돈 주고 유명인을 초청할 필요 없이 유튜브로 언제든 볼 수 있으니, 그 돈을 좋은 곳에 쓰자는 의도에서 하신 말씀 같았다.


교수님은 그 비용을 구체적으로 어디에 쓰자고 하셨을까? 

기부? 기부는 젠틀한 행위지만, 젠틀한 사회를 만들기에는 역부족이라고 생각한다. 

교수님의 의견을 듣지 못해 아쉬웠다.


나의 경우는 축제에 관심이 없을 뿐, '축제 무용론'에 동의하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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